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뭔가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랬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날 것’은 그 자체로 매력적일지 모르나 거기에 아카데미 시상식 89년의 역사와 전통에 걸맞지 않는 충격적인 실수까지 포함하고 말았다.

최대 하이라이트인 작품상 발표를 ‘라라랜드’에서 ‘문라이트’로 번복하는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며 ‘지상 최고의 시상식’이라는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미 수상 소감을 발표한 ‘라라랜드’ 팀에게는 말로는 표현 못할 황당함을, ‘문라이트’ 팀에게는 김빠진 사이다 같은 맛없는 기쁨을 선사하는 순간이었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이라는 최고의 영예로운 순간에 그야말로 반 쪽짜리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연출된 몰래 카메라였다면 좋았을 장면이 실수의 정점이었던 셈이다.

회계사 브라이언 컬리넌이 트위터에 여배우들의 무대 뒷모습 등을 실시간으로 업로드 하면서 한눈을 파는 사이 자신의 임무였던 수상작에 대한 봉투 전달이 잘못 되어 벌어진 실수였다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자 집계와 발표를 맡고 있는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가 공식 입장을 내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편집 불가능한 생방송 NG장면을 이미 전 세계인들이 시청한 터라 어떤 식으로든 이 대형사고의 봉합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그저 잊혀 지기만을 바랄 뿐. 다행인 것은 이런 큰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쇼’는 ‘그들만의 쇼’를 벗어나 진화했다.

세계 영화시장을 독식하고 있는 할리우드에서 ‘인종차별’의 현장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었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일컫는 일명 ‘화이트 오스카’. 자유로움이 넘쳐나는 그 곳에서 ‘인종차별’이란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명예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드디어 이번 시상식에서 빛을 발했다.

작품상을 받은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는 흑인 소수자의 성장기를 그려내고 있다. ‘라라랜드’의 음악과 춤이 주는 화려한 마법과는 달리 빈민가의 흑인이라는 등장인물의 설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듯 영화는 시종일관 슬픈 아픔의 정서로 가득 차 있다.

복잡한 캐릭터를 훌륭하게 연기해 낸 마허샬라 알리는 배우로서 아카데미상을 받은 최초의 무슬림 흑인 배우라고 하니, 이번 남우조연상 수상이 주는 의미는 꽤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다. 흑인 감독이 연출하고 흑인배우들이 표현한 흑인 소수자의 이야기가 ‘반(反) 할리우드식 공법’으로 진정성을 보이며 비로소 아카데미에서 통한 것이다. 반가운 이변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반(反) 트럼프 정서’와 그 궤를 함께 하면서 마침내 ‘인종차별’이라는 불명예 꼬리표를 성공적으로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트럼프의 정책에 반기를 들며 ‘화이트 오스카’를 벗어나 다양성을 회복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트럼프의 反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해 소송을 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지지하기 위해 배우들이 자신의 의상에 부착한 ‘파란 리본’은 레드카펫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전 세계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들의 책임 있는 정치적 행동이기에 파란 리본이 갖는 상징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사상 초유의 대형 사고에도 불구하고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쇼임에는 틀림없었다. 트럼프 정부를 시상식 내내 신랄하게 디스할 수 있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넘쳐나는 그들의 무대였기에 가능했다. 그야말로 펄떡이는 ‘날 것’이었다. 또한 할리우드 관광객을 즉흥적으로 시상식에 초대해 관객과 스타의 거리를 허물어버리는 ‘날 것’의 생동감은 다른 시상식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 그 자체였다.

우리는 언제쯤 ‘날 것’의 매력이 존재하는 영화 시상식을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사고 없는 ‘날 것’ 말이다.

●권상희는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와 국민대 대학원 영화방송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2년부터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방송진행 등 다양한 미디어를 경험했고, 고구려대학 공연예술복지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한 뒤 문화평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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