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양지원] 고작 여섯 살의 나이에 영화 ‘마음이’(2006년)로 대중 앞에 나선 김향기는 어느 덧 데뷔 12년 차를 자랑하는 ‘베테랑’ 배우가 됐다. 아직도 ‘낭랑 18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남다른 책임감과 연기에 대한 소신은 영화 ‘눈길’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위안부 피해 소녀 종분 역으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보여줬다.

‘눈길’은 1940년대 일본강제기 말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다. 잊지 못할 아픔과 상처를 겪는 두 소녀 종분과 영애(김새론)의 모습이 애달프기 그지없다. 하지만 여타의 위안부 소재 영화와 달리 ‘눈길’은 자극적이지 않다. 성적, 폭력적인 묘사를 최대한 배제했다. 미성년자 배우들을 생각하는 이나정 감독의 배려다.

“사실 처음에는 ‘이 연기를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막상 (김)새론이와 촬영하면서는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부담을 덜었던 것 같아요. 특히 감독님께서 많이 배려해주셨어요. 자극적인 장면을 연기하면 내면적, 정신적으로 힘들까 봐 걱정을 많이 하셨죠. 충분히 배려해줘 심적으로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위안부 피해 여성 소재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도전과 같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인 만큼 배우로서 접근하기 쉽지 않다. 김향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소재인 게 맞죠. 연기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한 분이라도 좀 더 많이 알아주셨으면 했죠. 아직 생존해 계신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이야기나 실제 상황을 찾아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죠.”

김향기는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이상으로 위안부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봤다. 본격적으로 촬영에 돌입하며 위안부 피해여성을 위한 기부 사이트가 있는 것을 알게 됐고 친구들과 함께 ‘나눔’을 실천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위안부와 관련해서 스스로 찾아볼 기회는 적었다고 생각해요. 촬영을 시작하면서 많은 자료들을 찾았고 그 분들을 위한 기부사이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팔찌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물품을 구입하고 친구들에게도 이런 사이트가 있다는 걸 알려줬죠. 저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위안부와 관련해서 관심이 커진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잊지 말아야 할 일인만큼 모든 분들이 가슴에 깊이 새기고 기억하셨으면 해요.”

극중 종분은 부잣집 딸인 영애와 달리 학교도 가지 못하고, 비단옷도 입지 못한다. 남동생에게 늘 좋은 것들을 양보하며 사는 소녀다.

“각자 배역에 맞는 게 있는 거잖아요. 실제로는 새론이가 부럽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웃음). 종분이가 영애를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잖아요. 자신과 달리 영애는 화려한 겉모습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걸 대놓고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봐야 했는데 영화에서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종분이는 영애와 달리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캐릭터다.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는 위안소로 끌려왔지만, 꼭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종분이가 철이 없지만 늘 긍정적으로 밝은 아이잖아요.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는 모습이 저와 닮은 것 같아요. 힘든 상황에서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거든요. 만약 종분과 같은 상황이라면 너무 힘들겠지만, 그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을 것 같아요. ‘영애와 꼭 살아남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기했어요.”

가슴 아픈 영화 ‘눈길’이지만 곳곳에는 삶의 향기가 배어있다. 종분과 영애의 우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따뜻한 감동을 준다. 또 종분이 영애의 오빠 영주(서영주)를 짝사랑하는 모습이 풋풋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를 찍기 전에는 짝사랑하는 모습을 연기한 적이 없어요. ‘눈길’로 인해 새로운 감정을 경험했죠. 사실 초등학교 2학년 때 호감을 느낀 친구가 있었는데 짝사랑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죠(웃음). 실제로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모르고, 경험도 안 해봤어요. 작품을 통해 미리 경험한 게 참고가 될 것 같아요.”

김향기는 어린 시절부터 또래 친구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세상에 눈 뜨기도 전인 29개월에 유아 잡지 모델로 발탁됐고, 6세부터 아역배우로 활동했다. 연기에 대한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못 느낄 수 없을 터다.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는 건 거짓말이죠. 같은 일을 하는 또래 언니들이나 친구들 모두가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주어진 역할에 열심히 해서 한 단계씩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각자에게 맞는 역할이 있고 본인이 원하는 이미지가 있을 테니까요. 마찬가지에요. 너무 조바심을 느끼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있어요.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은 아직까지는 없고요. 로맨스도 어른이 되면 충분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사진=임민환 기자 limm@sporbiz.co.kr

양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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