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유도 국가대표 지도자였던 이원희(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선배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여자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 유도 기술 절반으로 이기고 있다가 굳히기 기술로 역전패를 당해서 지는 경우가 빈번하다면서.’ 그것이 처음으로 국가대표 유도 선수들에게 주짓수 기술을 전파하게 된 시작이었다.”

◆ 질풍노도의 시기, 무기정학과 맞바꾼 유도장행

경기도 하남 미사에서 ‘안철웅 유도 앤 주짓수 멀티짐’과 국내 최고 주짓수팀인 ‘와이어 주짓수 하남 미사점’을 운영하는 안철웅 관장은 유도 선수 출신이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유도부로 잘 알려진 보성중학교(이하 보성중)에 입학했다. 유도 입문 전이었지만 지역 특성상 살던 동네에서 보성중에 배정될 확률이 낮았다. 보성중에 입학하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여느 다른 중학생과 다름없이 그에겐 ‘중2병’이 찾아왔다. 체격 좋은 반 친구 **이 하루가 다르게 여러 학우를 괴롭히며 일명 ‘빵셔틀’을 시켰다.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으나, 친한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자 결국 불의를 참을 수 없었던 안철웅 관장이 나섰다. 격해진 몸싸움에 안철웅 관장은 주먹을 날렸고, 결국 이 싸움으로 인해 그는 처벌도 모자라 무기정학을 통보 받았다. 담임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무기정학을 통보하는 순간,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자부했던 그는 억울한 마음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때, 반 친구 한 명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선생님! 철웅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파도타기하듯, 앞에 앉은 친구, 옆에 앉은 친구, 그 뒤에 친구 여럿이 벌떡 일어나 “**이가 잘못했습니다! 철웅이 잘못이 아닙니다!”, “**이가 잘못한 게 맞습니다!”라며 일제히 대변해주었다. 다행히 그렇게 편을 들어준 친구들 덕분에 오해가 풀렸고, 안철웅 관장 역시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고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그는 유도부에 가입했다. 사춘기 시절에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고스란히 예로 시작하여 예로 끝난다는 예시예종(禮始禮終)이란 유도의 기본정신에 바치게 된 것이다.

그의 부모는 그가 어려서부터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사주지는 않아도 태권도, 피아노, 서예, 미술 등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안철웅 관장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유도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시간이 지나 부모가 되고 나니,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은 스스로 깨달으면서 진로를 찾아 나가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 '꽃길' 유도 국가대표가 더 험난했던 이유

보성중을 졸업한 안철웅 관장은 보성고등학교(이하 보성고)에 입학했다. 안철웅 관장이 입학하던 시절의 보성고는 1998년 전국 6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등 단체전 47연승의 대기록을 세우며 고교 유도를 평정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 남자 대표팀 8명 중 4명, 2000년 시드니 올림픽팀에서는 7명 중 5명,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7명 중 3명이나 보성고 출신이 출전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보성고 동문인 권성세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유도계에서는 ‘보성사단’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보성고를 입학하며, 안철웅 관장은 훗날 ‘유도 레전드’가 된 이원희, 권영우, 김광섭 등의 선배들과 평생의 스승이 된 권성세 감독을 만났다. 권성세 감독은 누구에게도 ‘운동하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보성고’라는 자부심과 ‘지기 싫다’, ‘최고가 되겠다’라는 자존심이 자발적인 훈련을 하게 만들었다.

“당시 친구들과 자주 했던 이야기는 ‘남녀 공학으로 전학 가서 수학여행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학교에서 평범한 소풍이나 수학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가보고 고교 시절 내내 고립된 선수생활을 했다.”

안철웅 관장은 그 시절만큼 행복한 적도 없다고 강조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아무 생각 없이 놀기만 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뚜렷한 목표가 있었으며, 미래를 위해 ‘유도’에만 몰두하며 최선을 다해 달려 나갔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억에 남는 일화 중 하나로 ‘보약’에 관한 것을 손꼽았다. 안철웅 관장의 부모는 유도부 생활을 하면서 고된 훈련과 잦은 체중 감량으로 힘들어하는 그가 안타까웠는지 보약을 지어주었다. 그 쓰디쓴 보약이 먹기 싫어 하수구에 버린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고 고백했다. “그땐 어찌나 철이 없었는지….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다. 앞으로는 제가 부모님께 보약을 지어드리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유도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한양대에 스카우트 됐다. ‘보성중-보성고-한양대’로 이어지는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안철웅 관장이었기에 대학교 입학을 하면서 ‘꽃길이 펼쳐질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신나고 좋았던 마음은 잠시, 한양대는 용인대 선수를 이겨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운동량과 강도는 고교 시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높았다. 이 시기에 유도를 그만두는 동료들이 쏙쏙 생겨났다.

◆ '괴물 유망주' 김재범과 만남

안철웅 관장 역시 진지하게 유도를 그만두는 것을 고민했다. 꽃길만 걸어왔기에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꽃길만큼 걷기에 힘겨운 것도 없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내고, 벌레를 몰아내고, 폭풍우 같은 비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꽃길은 금방 피폐해진다. 안철웅 관장이 꽃길에서 비틀거리고 있을 때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이는 다름 아닌 당시 한양대 김석규 감독이다.

김석규 감독은 안철웅 관장에게 편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대신 선배들의 매니저 구실을 할 것을 제의했다. 안철웅 관장은 의외의 제의에 유도를 계속하게 되었고, 그 무렵 2003년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입상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고,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훈련하게 되었다. 유도의 새로운 즐거움을 깨달아 가니 나날이 실력이 향상되며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듬해 안철웅 관장은 전국 대학유도연맹전에서 전 경기를 한판승으로 이기며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는 결승전 경기를 앞두고 ‘오늘은 내가 무조건 금메달을 따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입맛을 다시며 매트에 올라섰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김재범 (2012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 매트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김재범은 전년도 청소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유망주로 떠오른 시점이다.

“태릉선수촌에서 함께 훈련했던 사이이기에 워낙 까다로운 선수인 건 알고 있었지만, 유독 그날 재범이의 몸놀림이 좋았습니다. 경기 내내 밀리다가 경기 종료 40초를 남기고 한판패 당했습니다.”

아쉬운 경기였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없는 경기였다. 안철웅 관장과 함께 선수촌에서 훈련했던 선수들, 그리고 그와 수많은 대회에서 경기를 펼쳤던 선수들은 훗날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안철웅 관장은 그들이 메달을 획득할 때마다 힘찬 박수를 보냈다. 안철웅 관장이 선수 시절 노력했던 만큼,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결실인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글렌다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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