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페사로월드컵대회에서 손연재(왼쪽)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은 박 교수. /박정민 교수 제공

[한스경제=글렌다박 기자]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스켈레톤 윤성빈, 펜싱(에페) 박상영, 그리고 리듬체조 손연재의 공통점은 해당 종목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성장해 국제 대회 최고의 성적을 거둔 선수라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스포츠 종목엔 토대를 닦은 1세대 선수들이 존재한다. 리듬체조와 치어리딩 국제심판이자 한양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박정민 교수는 리듬체조 1세대 선수다. 박 교수는 1980년대부터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며, 은퇴 후 국내 ‘치어리딩’ 스포츠의 기초를 세운 일원이다.

◆ 리듬체조 입문

박 교수는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서울여자고등학교가 서울에서 열린 제61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매스게임의 지정학교가 되면서 생전 처음으로 ‘리듬체조’에 입문했다. 당시엔 1학년 전교생이 매스게임에 동원되었기에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겁 많고, 독서를 좋아하며, 사색을 즐겼던 소녀에게 ‘리듬체조’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다. 역동적이고도 아름다운 동작과 움직임, 그리고 음악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몸이 약했던 박 교수는 학창시절 체육 시간이면 양호실에 누워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불가리아 선수의 예술감 넘치는 연기를 눈앞에서 본 순간, 마력에 빠지듯 이끌리게 됐다.

항상 부모에게 순종적이었던 어린 소녀는 처음으로 리듬체조 앞에서 부모님과 대립했다. 2년이 넘은 시간이 흐른 고교 졸업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동안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며 학업에 충실했던 딸이 한순간 운동선수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며 체육 관련 전공학과 진학을 선택하자 실망과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드디어 본격적으로 리듬체조를 할 수게 되었던 박 교수는 당시를 아직도 감격스럽게 기억한다.

"리듬체조를 하게 되어 체육관을 방문한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리듬체조 매트 위에서 선수들이 공연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듯 심장이 뜁니다."

◆ 훈련, 훈련, 그리고 훈련

그날부터 체육관 40바퀴를 뛰기 시작했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구사하고자 했던 동작들을 하나하나 완성할 때마다 행복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했지만 빠른 속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모습 때문에 주변의 시기 질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실력은 종목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체중 감량을 위해 소꿉장난감처럼 작은 용기에 도시락을 담아 싸서 점심을 먹는 건 다반사였고, 생전 처음으로 보리빵을 먹었다. 고난도 동작을 연습하는 과정은 눈물겨웠다.

고난도의 기술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며 많은 훈련량을 소화하다 보니 근육 경련이 일어나고 하고 허리가 아파서 꿈쩍하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유연성 훈련을 하다 보니 지하철에서 다리를 모으고 앉을 때면 고통이 몰려왔다. 겨울엔 난방 없는 열약한 체육관에서 꽁꽁 언 손으로 곤봉 연습을 하고, 매트도 없는 마룻바닥에서 수구를 던지며 훈련을 했다.

"곤봉을 받은 손바닥과 수구를 받아낸 온몸은 피멍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목욕탕에 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어요. 훈련이 끝나고 집에 가면 몸이 너무 아팠지만, 부모님이 아시면 리듬체조를 못하게 될까 봐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두꺼운 담요를 두 개나 덮고 울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과 1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1984년 ‘제1회 서울시회장배쟁탈 리듬체조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선수로서 출전하는 첫 대회였다. 3위로 동메달을 획득했고, 꿈을 이루었다. 부상이 있었기에 아쉬웠지만, 좋은 음악 선정을 위해 지인인 피아니스트도 찾아가고 유명 재즈 가수를 찾아가 재즈바에서 동작을 보여주는 등 고군분투했다. 뿐만 아니라 의상도 만들고, 훈련도 홀로 했다. 그랬기에 더욱 값진 결과다. 그러나 끝까지 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던 부모의 냉대 속에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축하받지 못했고, 대회에서의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그는 이따금 당시 대회에서 수상한 메달을 꺼내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2003년 유니버시아드 대회 심판으로 참가한 박 교수.

◆ 지도자 길을 걷다

1984년 국내에서 첫 리듬체조 대회가 열렸고,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로 리듬체조 종목은 자국 티켓으로 출전할 수 있게 됐다. 1988년 당시 이미 대학을 졸업했던 박 교수에게 모교인 서울여고의 은사는 기계체조 선수인 김인화, 채린과 함께 훈련할 것을 제안했다. 합동훈련을 계기로 박 교수는 미국 LA로 가게 되었다. 그는 이미 현지에서 리듬체조를 연마하고 있었던 홍성희의 집에 머물며 소련에서 망명한 세계적인 지도자이자 미국 리듬체조 국가대표 Alla 감독의 지도를 받았고, 세계 속의 리듬체조를 경험하고 돌아왔다.

첫 대회 출전 이후 부상으로 인해 하반신 불구가 될 수 있다는 정형외과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너무 아프고 놀랐기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어 강의에 출석할 수 없는 날이 잦아졌다. 그래도 공연 및 발표회만큼은 진통제를 맞고 먹으며 끝냈다. 사막처럼 막막하고 험준한 선수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교수와 선배 선수들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경기지도자로 길을 추천했다.

"제가 지도하는 학교며 선수들이 전국 초, 중, 고 매스게임 대회의 대상을 시작으로 대회 수상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신이 선사하신 또 다른 재능이 '코치'로서 '지도력'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마도 선수 시절 체계적인 신체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꾸준히 실천한 결과, 부상의 아픔에 대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전지훈련 중 배웠던 재즈댄스의 도움도 컸어요."

박 교수는 1985년부터 2000년까지 동일여고, 신정여중, 상명여중, 수도여고, 이화여대, 한양대 등에서 리듬체조 지도자를 역임했다. 2011년에서 2013년까지 국가대표 여자 기계체조 및 리듬체조 선수에게 재즈댄스 및 무용 지도를 했다. 그리고 1989년부터 현재까지 리듬체조 국내 및 국제 심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치어리딩 국가대표 선수들은 2019 ICU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최초로 파이널 진출의 쾌거를 이뤘다.

◆ 치어리딩에 몸담다

박 교수가 처음부터 리듬체조에서 치어리딩 종목으로 전환한 것은 아니다. 치어리딩 종목의 활성화를 위한 도움 요청을 여러 번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결국 스포츠의 발전을 지향하며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연속으로 치어리딩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지휘봉을 잡았다.

1989년 미네소타 대학교 학생 쟈니 캠벨 (Johnny Campbell)의 응원 챈트로 시작된 치어리딩은 그 후 제프 웹 (Jeff Webb) ICU (International Cheer Union) 회장을 통해 활발히 성장하고 있다. 종주국인 미국의 치어리딩은 긍정적인 사고와 협동심, 리더십을 추구한다.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레이건, 조지 부시 전 대통령들이 치어리더 출신인 것이 좋은 예다.

"여러 명이 함께하여 파워풀하고 활력이 넘친다는 것과 경합, 경연의 느낌보다는 관중이 하나 되어 응원하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무엇보다 치어리딩은 즐겁고, 서로를 배려해주며, 밝은 에너지로 사람들을 응원해줄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치어리딩은 크게 팀 치어와 퍼포먼스 치어 부분으로 나뉘며 이하 세부 종목이 있다. 최소 2명부터 팀 구성이 가능하지만, 평균적으로 16명에서 최대 24명으로 구성된 팀이 출전한다. 국내에서는 '치어업! 코리아 Open! 치어리딩 페스티벌', '전국학교스포츠클럽 대회', '전국 치어리딩 스포츠클럽 대회'가 있다.

현재 국내에 치어리딩 실업팀은 없다. 은퇴 선수들은 지도자,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 강사, 치어리딩 용품 사용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동안 치어리딩 선수들은 공식적으로 체육특기생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한국체육대학에서는 2021년을 기점으로 치어리딩 체육특기생을 선발하겠다고 발표했다. 박 교수는 점차 치어리딩 선수들을 위한 대학 입학의 통로가 넓어지고 훈련 환경이 나아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 리듬체조 vs 치어리딩

리듬체조와 치어리딩. 두 다른 종목을 지도할 때 가장 비슷한 점은 신체 정렬 및 체조 동작들, 그리고 기본 무용 동작들과 유연성이다. 반대로 가장 다른 점은 활성화 되어야 할 근육의 쓰임새라고 할 수 있다. 리듬체조는 우아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동작을 위한 근육을 쓴다. 반면에 치어리딩은 빠르고, 파워풀한 동작을 위한 근육을 만들어야 한다.

"2018년 ‘전국학생스포츠클럽 대회’ 최종 결승전 당시 멘토 심판으로서, 마이크로 각각의 팀마다 심사평을 해주어야 했는데 참가한 학생들과 선생님들, 관중까지 모두 제게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미흡하고,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 평을 할 경우, 실망할 것이 마음 쓰여 단어 선정과 문장을 만드는 데 애를 썼던 기억이 남습니다."

박 교수가 치어리딩 국가대표 감독자리에서 물러난 후 팀치어는 장진우 감독, 팀치어의 올걸 (All Girl) 종목은 손윤미 코치가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의 한국 국가대표는 프리스타일 팜 (Freestyle Pom) 세계 9위다. 팀치어는 아직 성장하고 있는 단계이다. 박 교수는 대한치어리딩협회에서는 지난 17년간 지속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앞으로 더욱 향상된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다.

2019년 미스발렌타인 대회에서 동료 심판과 함께 포즈를 취한 박 교수(왼쪽).

◆ 박 교수의 무한도전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는 시범종목, 그리고 2028년 LA 올림픽에서는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것이 유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적으로 치어리딩의 저변은 넓어지고 있다. 박 교수는 그동안 본인의 리듬체조 선수, 지도자, 심판 경험과 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치어리딩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지도하였다. 또한, 치어리딩 협회의 치어리딩 경기력 향상 위원장으로서 국내 치어리딩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국내 치어리딩 대회의 심판으로 활발하게 참가하며 국내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종목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 동호인 모임 같은 스포츠 클럽을 통한 생활 체육으로서의 보급, 청소년 대상 적합한 치어리딩을 방과 후 체육프로그램으로 진수, 지도자 육성을 통한 엘리트 선수 발굴 및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최, 국제심판 양성, 협회의 중립성 및 행정력 보급 등이 국내에서 인지도가 낮은 치어리딩 스포츠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치어리딩 협회에서는 경기력 향상 위원장,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직분과 직책을 이어 나가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내려놓은 상태다. 그래도 여전히 제도적으로 많은 부분 보수가 필요한 심판 자질과 능력에 있어 32년간 심판 경험과 리듬체조 심판위원장으로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공정하고 전문성 있는 심판을 배출하는 것에 이바지하는 것이 목표다. 지도자로서 박 교수의 꿈은 한결같다. 그는 현재가 아닌, 먼 미래를 바라본다.

"국내 선수와 선수들을 지도하는 일부 지도자들에게 훈련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통해 재능과 역량을 100% 이상 끌어올려 유니버시아드대회나 올림픽 메달을 향해 나아가는 국제적인 선수를 배출하는 것이 꿈입니다."

글렌다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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