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양지원] 오랜만에 다시 만난 김명민은 여유와 위트가 철철 넘쳤다. 가벼운 농담과 유머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본래 인터뷰를 할 때 ‘분위기 메이커’로 활약하는 김명민이지만, 예전보다 여유로움은 더욱 배가됐다. 삶을 대하는 태도도 한층 유연해졌다. 마흔 다섯의 김명민은 나이가 든 뒤 여유와 행복이 찾아왔다고 했다.

“여유는 나이에서 오는 것 같다. 예전에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나이가 드니 책임감이 생긴다. 주연배우로서 단순히 해야 할 일이 연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젊었을 때는 이런 걸 잘 몰랐던 것 같다. 이 나이 대가 되니 얻는 것이 더 많다. 예전에 갖지 못한 것을 가지게 됐다. ‘젊은 게 깡패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나는 이대로가 좋다. 삶에 만족하고 있다.”

때로는 ‘인간’ 김명민으로서 삶을 즐기고 싶다고 했다. 연기 인생 20년 동안 촬영장과 집을 병행하는 삶에 고단함을 느꼈단다.

“집과 촬영장만 다니며 살았던 것 같다. 이걸 빼면 난 뭐하고 살았나 싶더라. 물론 취미로 등산도 했지만 그것마저 촬영을 위한 것이었다. 언젠가는 연기를 그만둘 때가 올 것 아닌가. 그 다음에 할 것들을 생각하게 됐다. 이런 자리에 있을 때 연기를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서히 한 계단 두 계단 밀려나다 연기를 그만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좀 더 애정을 갖게 된 김명민이지만,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연기력만큼은 여전했다. 영화 ‘하루’(15일 개봉)에서 딸 은정(조은형)을 살리기 위해 하루를 바꾸려 고군분투하는 가장 준영 역으로 또 인생 연기를 펼쳤다. 데뷔 후 처음으로 타임루프 소재를 만났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헷갈렸다.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영화다보니 관객들이 봤을 때 잘못하면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았다. ‘편집을 했는데 안 들어맞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했다. 타임루프 작품을 처음 해 봤는데 정말 힘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식상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니까. 이제 타임루프 영화는 하고 싶지 않다(웃음). 어떤 선배는 영화를 고르는 순서가 입금 순이다, 액션 순이다 얘기하는데 나는 아직 그 정도 경지에는 오르지 못한 것 같다.”

김명민의 고군분투는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됐다. 딸이 사고로 죽은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난 뒤 자괴감과 극한 분노를 느끼며 스스로 가차없이 뺨을 내리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울린다.

“그 장면을 찍다 눈을 한 번 잘못 때려서 핏줄이 터졌다. 스태프들이 와서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세 보이고 싶어서 안 아프다고 했다. 사실 엄청 아팠다(웃음). 콘티 없이 찍었다. 걸어가서 은정이 앞에 있을 때까지 계산이 안 됐다. 동물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감정에 맡기자는 생각으로 촬영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든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장면 아닌가?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 자신한테 화살이 돌아올 것 같았다.”

이 장면은 인천의 박문여고에서 약 3주 동안 촬영됐다. 당시 무려 40도까지 기온이 오르는 땡볕더위 속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김명민은 “다시는 박문여고 쪽은 가고 싶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박문여고 사거리에는 밥차도 들어올 수 없었다. 먹고 살기는 해야 하니 주로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식당에 가서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돗자리를 깔고 다 같이 모여 앉아 자장면을 먹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면 비켜줬다. 고생 안 하는 배우는 없겠지만 정말 힘들게 촬영한 건 사실이다. 이번에 영화 ‘V.I.P’를 송도에서 촬영했는데 박문여고 앞을 지나가지 말자고 했다.”

김명민은 이번 작품을 통해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호흡한 변요한과 재회했다. 사실 조선호 감독에게 변요한을 상대 역으로 강력히 추천하기도 했다.

“변요한은 연기에 임하는 자세가 너무 좋다. 연기를 하기에 앞서 늘 토론을 하려고 하는데, 사실 요즘 후배들 중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 선배에게 먼저 다가와 연기 조언을 구하는 후배도 없다. 그런데 먼저 다가와서 연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을 요청했다. 밤을 새서라도 연기에 대해 더 얘기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김명민은 데뷔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다. 대표작인 드라마 ‘하얀거탑’(2007년)은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다수의 작품에서 늘 혼신의 힘을 쏟은 김명민의 별명은 ‘연기 본좌’다.

“제발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소름이 끼쳐 못 견디겠다. 대선배가 ‘본좌가 뭐야?’라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연기 본좌’라는 별명이 붙은 후 없던 안티마저 생겼다(웃음). 내게는 너무 과한 수식어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양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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