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 겪은 불의를 노래로 표현한 가수 키디비(왼쪽)와 주니엘.

[한국스포츠경제=정진영 기자] 도서 '82년생 김지영'을 필두로 최근 몇 년 간 문화예술계에서는 여성의 서사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소개됐다. 연극계에서는 '페미니즘  연극제'가 열렸고, 비록 그 결과물은 의도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 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미옥'이나 '악녀'처럼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액션 영화도 개봉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국내 가요계에서도 여성들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뮤지션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성이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폭력과 차별들에 주목하는 사회적 담론에 궤를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 자전적인 이야기의 힘

최근 몇 년 간 인디신에서 주목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노래를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들이 많다. 새로운 스타일의 포크 음악을 기반으로 한 뮤지션 버둥의 경우 자신이 10대 시절 경험했던 배제의 경험을 녹여낸 앨범 '조용한 폭력 속에서'로 관심을 받았다. 이 앨범에서 버둥은 '걸칠 게 없는 소년은 외투를 입은 나를 보네. 언젠가 날 울게 할 그 때 그 기억은 이대로 잊어도 괜찮을까'('다시 날 잊어가기 전에')라며 아마도 자신이 투영됐을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고 '이렇게 예뻤던 나를 얼마에 가지고 싶나요. 이렇게 아름다웠던 나를 얼마에 가지고 싶나요. 이렇게 나를 더럽게 봐도 왜 손을 놓지 않았나요'('하우 머치')라며 여성들이 밥 먹듯 마주하는 혐오의 표현들을 늘어놓는다. '조용한 폭력 속에서'로 앨범 이름처럼 조용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버둥은 최근 뮤지션 지원 프로그램 '뮤즈온 프로젝트'에 참여, 3라운드까지 진출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가수 버둥.

보다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래들도 있다. 데뷔 때부터 뛰어난 작사, 작곡 능력을 보여줬던 가수 주니엘은 자신의 실제 연애에서 영감을 받아 쓴 노래 '라스트 카니발'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데이트 폭력을 주제로 한 이 노래는 주니엘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작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음원 발매 당시 주니엘은 "데이트 폭력을 겪으며 굉장히 힘들고 아팠다"면서 "(피해자들이) 꼭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아픔 속에서 조심히 빠져 나왔으면 좋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주니엘의 데이트 폭력 경험 고백은 여성들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쉽게 '연인 간의 갈등' 정도로 치부되기 쉬운 데이트 폭력은 실제 피해를 당하는 이들에겐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운 덫과 같다. '안전 이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들은 이별을 통보했을 때 발생할 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쉽게 상대에게 헤어지자는 이야기조차 하지 못 하기 일쑤다. 때문에 피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은 적을 수밖에 없고, 심각한 문제인 데이트 폭력의 실체는 지워지기 쉽다. 하지만 주니엘의 용기 있는 고백 이후 많은 누리꾼들이 용기를 내 자신의 데이트 폭력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래퍼 자이언트 핑크까지 전 남자 친구에게 당했던 폭행 경험을 공개, 피해자들과 연대했다.

주니엘 '라스트 카니발' 표지.

'제 1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알앤비&소울 음반 부문 최우수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제이클레프 역시 자신이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과 일상을 녹여낸 노래들로 많은 마니아들을 보유하고 있다. 2017년 발매한 데뷔 곡 '멀티플라이'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춘의 쓰디쓴 현실을 노래했던 제이클레프는 지난 해 '흠'을 가진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플로, 플로'로 평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어 올 여름 싱글 '마마, 시'에서는 본격적인 여성의 서사를 노래했다. '나는 셋의 딸을 둔 엄마가 다리를 펴고 잠에 들길 바라요. 엄마가 상영한 악몽이 실화 바탕이란 걸 나는 알아요', '너무 흔해 빠져 메인이 될 수 없는 뉴스 속에는 우리네 차례가 아니었을 뿐인 소식들. 그곳을 간신히 내가 피하면 족하다는 식으론 살 순 없잖아요'라는 가사들은 여성이 살면서 겪는 직·간접적인 폭력들이 얼마나 일상적인지를 나타내준다.

■ 키디비의 용기, 피해자를 재정의하다

2016년 국내 힙합계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대 논란이 일었다. '디스리스스펙트' 일명 상대를 깎아내리는 '디스'라는 문화가 있는 힙합계에서는 특정인을 저격한 노래들을 종종 찾을 수 있다.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Mnet '쇼미더머니'에는 이런 '디스' 배틀로 출연자를 평가하는 라운드가 있으니 특별히 모난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2016년 블랙넛이 여성 래퍼 키디비를 대상으로 한 성희롱 가사들을 적은 것은 단순한 '디스' 문화의 차원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실제 블랙넛은 공연에서 키디비의 사진을 화면에 띄워 놓고 성적으로 모욕감을 줄 수 있는 퍼포먼스까지 해 물의를 빚었다.

'표현의 자유'가 약자를 모욕하고 희롱하는 방식에 적용되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지만, 처음 블랙넛이 위와 같은 노래들을 불렀을 때만 해도 일각에선 "이런 디스야 흔하지 않느냐"는 반응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 건 키디비 자신이었다. 키디비는 성폭력범죄 등에 관한 특례법위반과 모욕 범행으로 블랙넛을 고소했다. 법정에 출석하면서도 앨범을 홍보하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1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뒤에도 기리보이의 노래에 '법이고 윤리고 시끄러 비켜', '그까짓 공권력 안 쫄려' 등의 가사로 참여한 블랙넛. 잘못을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는 가해자에 비해 키디비는 한 동안 앨범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사건 이후 1년이 넘게 침묵했던 키디비는 'SBS D포럼'에 연사로 나서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수차례 성적 모욕을 당했고 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기도 했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쾌했지만 사회적 분위기상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2차 피해도 걱정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내 깊은 곳에서 '넌 가만 있으면 안 돼. 늦었더라도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소송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그 선택에도 의구심을 갖게 되고 날이 갈수록 불안해져 잠들 수 없게 됐고 사람 많은 곳에 갈 수 없게 됐다. 자신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을 만들지도 듣지도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도 했다. 뻔뻔한 가해자와 그것을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자기 의심에 빠지게 된다. 이런 불의한 일의 반복에 키디비가 울린 경종은 비슷한 피해를 겪은 많은 이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키디비는 이 날 부른 '노바디스 퍼펙트'라는 곡에서 '티비에는 마른 몸을 강요하면서 잘 먹는 여자가 이쁘대. 원치 않아도 시작된 이 게임은 여자라는 이름에 그 참가 자격이 주어지지. 예쁜 애는 돈을 움켜쥐지', '누굴 만나고 누구와 자고 엿 같은 소문 들어야 하고. 그 XX는 잘도 살아가도 난 여자니까 감당해야 한다고'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키비디는 이번 여름 발표한 신보에 '마녀'라는 트랙을 수록, 다시 한 번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냈다. 이 노래에서 키디비는 누군가를 향해 '네가 X되길 바라'라고 여러 차례 반복하며 '2년을 숨도 잘 못 쉬고 날 탓하며 살았어', '한 번 더 두 번 더 세 번 더 할 수 있어. 멍청히 당하다 마녀가 되기로 했어'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면 '마녀' 취급을 받고 제거될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는 폭력과 차별의 피해에 대해 침묵한다. 키디비의 '마녀'에서 저격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특정돼 있지 않다. 하지만 키디비가 겪었던 것처럼 성희롱 등 범죄가 일어났을 때 숨어 있고 수치심을 느껴야했던 여성들에겐 이 노래가 남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멍청히 당하는 것보다 마녀가 되겠다'는 피해자의 태세 전환은 더 이상 누군가를 '마녀'로 모는 것으로 사방에 잔재한 폭력의 실상들을 지울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사진=OSEN, 뮤즈온 프로젝트 영상 캡처, C9엔터테인먼트 제공

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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