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정진영 기자] EBS 첫 연습생 펭수, tvN 금요 드라마 '쌉니다 천리마마트' 등 B급 정서를 정면으로 내세운 콘텐츠가 최근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이들은 다소 조악한 질과 성긴 완성도로 특징되던 과거의 B급 콘텐츠들과 달리 정성들인 B급물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

■ B급, 현실을 날카롭게 파고들다

펭수는 EBS 사상 첫 연습생이다. 남극에서 뽀로로를 보고 스타 펭귄의 꿈을 키웠고, 방탄소년단(BTS)을 보고 '글로벌 스타가 되려면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펭귄계의 BTS가 되겠다는 야심찬 꿈을 품은 그는 중간에 잠시 스위스에 불시착하긴 했지만 끝내 헤엄쳐 인천 앞바다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중간에 들른 스위스에서 제대로 배운 요들송이 특기다.

사실 이미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펭귄 캐릭터는 너무 많다. 비단 '초통령'(초등학생들의 대통령이라는 뜻의 신조어) 뽀로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뽀로로 이전에도 날고 싶은 아기 펭귄 보보, 꼬마 펭귄 핑구, 애니메이션 영화 '해피피트' 속 우주 최강 음치 펭귄인 멈블과 우주 최강 몸치 펭귄인 에릭까지. 펭귄 캐릭터는 세상에 차고 넘쳤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글로벌 스타'가 되겠다고 과감히 EBS에 도전장을 내민 펭수는 이전의 밝고 명랑하기 만한 펭귄들과 뭔가 다르다. 물론 펭수가 밝고 명랑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EBS 오디션 당시 펭수는 "생각해 보고 연락해 주겠다"는 면접관에게 "지금 (결과를) 얘기하라. 그래야 MBC든 KBS든 갈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면접을 본 뒤 마음 졸이며 수 주, 수 개월 동안 결과를 기다리고, 그 동안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이도 저도 못 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펭수의 이 같은 발언이 속 시원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펭수는 또 뚝딱이, 뽀로로, 번개맨 등 EBS의 다른 스타 캐릭터들과 경쟁에 대해서도 "우린 그런 것 없다. 누구 하나라도 잘되면 좋은 것"이라며 경쟁보단 화합과 지지를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EBS 사장의 이름을 "김명중"이라고 어떤 존칭도 없이 부른다. 지나친 관료주의, 수직적 조직체계,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계속되는 경쟁 시스템에 환멸을 느끼는 젊은층이 펭수에 열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펭수는 이 같은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다소 빈틈 있어 보이는 캐릭터에 녹여 재치 있는 B급 감성으로 전달하고 있다. MBC, SBS 등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들에서도 너도나도 펭수를 초대할 만큼 신드롬이 형성된 건 이 때문이다.

EBS 인기 캐릭터들인 먹니, 짜잔형, 번개맨, 펭수, 뽀로로, 뿡뿡이, 뚝딱이(왼쪽부터).

'쌉니다 천리마마트' 역시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한 번도 구직 활동을 해 본 적 없는 31세 뮤지션 조민달(김호영)과 IMF 경제위기 때 실직을 한 뒤 재기에 성공하지 못 하고 대리운전 기사를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55세 최일남(정민성)은 우연히 천리마마트에서 정규직을 뽑는다는 포스터를 보고 입사 지원, 면접장에서 서로 자신들이 더 쓰레기라며 불행 배틀을 벌인다. 이런 반면 천리마마트의 점장 문석구(이동휘)는 스스로 말하길 "하고 싶은 거 다 못 하고 자고 싶은 만큼 못 자고" 오로지 취직 활동에만 올인, 간신히 천리마마트의 모기업인 DM그룹에 입사한 케이스다. 지난 10년 간 20대 임금근로자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사회 상황을 감안할 때 2030 젊은층이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쓰레기나 다름 없다 여기는 쪽이든 인생을 모두 취직 활동에 쏟고 자괴감을 느끼는 쪽이든 '쌉니다 천리마마트'의 등장인물들에 몰입하는 건 자연스럽게 보인다.

'쌉니다 천리마마트' 스틸.

■ '선비질' 말고 재미… 젊은층 취향 저격한 B급 코드

날카로운 현실 묘사 외에도 이들 'B급 감성' 콘텐츠들이 사랑 받는 이유는 '재미'다. CJ그룹에서 약 12년 간 재직하며 신입사원 교육, 소비자팀 분석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한 임홍택은 자신의 저서 '90년생이 온다'에서 1990년생의 특징으로 '재미'를 꼽았다. 1980년대생 이전의 세대들이 삶에서 '목적'을 추구했다면 이들은 '유희'를 좇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지나칠만큼 세세하고 진지하게 설명하는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 '설명충'(설명과 벌레를 뜻하는 한자 충(蟲)을 합친 말)이나 고지식한 사고와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비하할 때 쓰는 '선비질'이라는 단어 등이 최근 젊은층들의 취향과 가치관을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특히 '선비질'이라는 말은 '선비', '선비충', '씹선비'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며 널리 통용될 정도다. 기존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에 대해 젊은층이 얼마나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B급 코드를 묘사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병맛'이다. 내용이 이상하거나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지는 콘텐츠들을 보고 흔히 '병맛미가 있다'고 한다. 임홍택 작가는 이런 '병맛 코드'가 유행하는 이유에 대해 "완전무결함만 살아 남는 답답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증가"라고 설명했다. 이제 타고난 재능, 혹은 끊임없는 노력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성공을 얻어내는 영웅의 서사는 젊은층에게 고리타분하게 받아들여진다. 그 보단 EBS 대선배 캐릭터인 뚝딱이의 충고에 "귀에서 피가 나겠다"며 귀를 틀어막는, 살짝 모난 돌처럼 보이기도 하는 펭수나 면접관 앞에서 "나는 핵폐기물이나 다름 없다"며 눈물을 보이는 조민달이 지금 젊은층에게 한층 가깝게 다가간다.

펭수와 뚝딱이

윙크도 눈으로 못 해서 손으로 한쪽 눈을 가려야만 할 수 있는 펭수. 하지만 그는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V2'에서 '못 하는 게 뭐냐'는 한 시청자의 질문에 "못 하는 걸 못 한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근거 없는 자신감일 수 있지만 펭수는 늘 당당하고, 그 점이 패배감에 젖은 젊은 세대들에게 웃음과 공감을 안긴다.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해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예요. 그게 꿈이고 그게 성공입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웃음과 통찰력이 모두 담긴 2019년 'B급 감성'의 현주소다.

사진=펭수 공식 인스타그램, tvN 제공

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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