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김진호 기자] 1348년 8월 영국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페스트라는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지만 막아낼 방법도, 도망칠 퇴로도 없었다.

동유럽부터 시작된 페스트가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초토화시키고 영국 상륙을 앞두고 있었으나 정부의 유일한 질병 대책은 국왕 에드워드3세가 사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뿐 이었다. 

부질없었다. 영국인의 절반이 죽어나갔다. 

사타구니나 겨드랑이가 부어오르는 것은 죽음 앞에 섰다는 신호였고 코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신의 대리자인 사제도.

주민 전체가 몰살당해 폐허로 변한 마을이 속출했고, 죽음의 공포와 살아가는 생존자들은 타락했다. 찰나의 쾌감을 즐기려는 풍조는 사회질서를 헤집었고 신정사회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편만했다.

병마가 물러갔다고 생명의 종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농노경제로 지탱되던 사회에서 절대적 인구감소란 경제수단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희생자가 귀족보다는 건강과 보건환경에 열세였던 하층민에 몰린 것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생존에 필수적인 농산물 생산에 투입될 인구가 급감하자 이번에는 굶주림으로 사람들이 죽어갔다.

영국은 페스트이후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 속에 모든 것의 변화를 강요당했다.

나머지 유럽이라고 영국보다 사정이 나을 수 없었다. 

영국에 도래한 페스트는 이미 이탈리아, 프랑스, 북부 아프리카 등을 황폐화시켰고 동유럽 또한 페스트의 사정권이었다. 

당시 2억 명으로 추산되는 유럽 인구는 페스트이후 1억 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로마이후 미약한 중앙집권적 정부형태를 띠고 있던 ‘하나의 유럽’이 이제는 개별 국가가 자신들의 생존을, 삶의 질을 결정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영국 정부는 익숙한 정책을 들고 나왔다. 기존 권력 시스템과 기득권 보호를 위해 하층민이자 생산인구인 소작농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페스트라는 극한의 경험을 통해 자각한 소작농들의 극렬한 반발에 영국 정부의 구태의연한 정책은 실패했고 특이하게도 영국 정부는 재빨리 실패를 인정하고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를 모색했다.

봉건시대 감히 누구도 생각지도, 꿈꾸지도 못했던 기득권과 하층민의 타협이었다. 재벌과 노조,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공생을 추구하는 역사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었다.

이같은 패러다임 전환은 명예혁명으로,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며 인류사의 획을 그었다.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의 선택은 달랐다.

페스트와 페스트이후 동일한 상황을 맞았지만 동유럽은 성주와 성직자, 귀족 등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봉건시대의 전통을 이어가기로 했다.

크고 작은 반발과 내부 모순 극복을 위한 변혁의 시점을 맞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동유럽의 선택은 더욱 강력한 역사의 반동이었다.

반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시민 계몽과 혁명을 체험하며 영국적 포용력으로 동화됐다.

오늘날 주류 역사학자들은 문명적 차이로 까지 벌어진 서유럽과 동유럽의 정치·경제·사회 격차는 이때 시작된 것으로 해석한다.

토마스 쿤이 설파한 패러다임을 현재 시점에서 해석하면 “역사의 발전은 진리의 축적에 의한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코로나19 이후) 혁명 즉 단절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쯤으로 다가온다. 

AC(After Covid19)시대. 선진국의 역사적 전유물이었던 미래 패러다임을 대한민국이 결정하는 시대다. 한반도 최초로 지구촌 역사를 끌고 갈 민족사적 기회를 잡았다.

김진호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