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박대웅 기자] 2008년 2월18일 당시 문화관광부·교육인적자원부·대한체육회는 '스포츠 성폭력 근절 대책'을 내놨다. '성폭력 가해자는 영구제명한다. 성폭력 신고센터를 설치해 원스톱 처리 체계를 마련한다. 지도자와 선수에게 연 1회 성폭력 예방 교육을 의무화한다'가 주요 내용이다. 그로부터 11년 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전 코치 조재범에게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당했다. 체육계 노력이 허무하게 뚫렸다. 입법·사법·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인권 전담 국가기관인 국가인원위원회(인권위)는 실태조사에 나섰다. 인권위가 내린 결론은 공부할 권리, 곧 학습권 침해가 폭력·성폭력으로 연관된다는 결론을 냈다.

2011년 7월 인권위는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폭력, 성폭력, 학습권 침해 예방을 위한 정부와 스포츠 관련 기관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선수와 지도자, 학부모가 지켜야 할 행동 기준도 마련했다. 2008년 이후 최근까지 대한체육회와 산하 종목 단체, 이들을 관리 감독하는 문화체육관광부는 징계를 강화하고 신고센터를 열었으며 교육도 강화했다. 단적으로 대한체육회는 2009년 6월 '스포츠人권익센터'(지금의 스포츠인권센터) 홈페이지를 열고 폭력과 성폭력 신고를 받았다. 2014년 2월 문체부는 폭력과 성폭력 등을 뿌리 뽑겠다며 산하에 '스포츠 4대 악 신고센터'(지금의 스포츠비리신고센터)를 열었다. 

고 최숙현 선수에게 폭행을 가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안주현. 연합뉴스

하지만 지난달 계속되는 폭력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전 국가대표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대표 고 최숙현 선수와 같은 비극은 막지 못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업팀 운동선수 125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실업팀 선수 인권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선수 33.9%는 언어폭력을 경험했고, 15.3%는 신체폭력을 겪었으며 11.4%는 성폭력을 당했다. 특히 신체폭력의 경우 응답자의 8.2%가 '거의 매일 맞는다'고 답했다. 폭력 가해자로는 남자 응답자는 주로 선배를, 여자 응답자는 코치를 지목했다. 문제는 신체폭력을 당해도 67.0%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답한 점이다. 폭력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보복이 무서워서'(26.4%)였다. 이어 '상대방이 불이익을 줄까 걱정돼서'가 23.1%였고, '대응 방법을 몰라서'도 22%로 높은 수치를 보였다. 

조사 보고서에 나온 선수들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20대 중반의 실업팀 선수는 "선수를 쓰고 버리는 물건으로 생각한다. 데려왔는데 실적을 못 내면 자르면 그만이지, 이런식이다"라고 했고, 20대 후반의 실업팀 선수 역시 "대부분 선수들이 자기가 우울증인 걸 모른다. 그냥 내 정신력이 약하다, 이겨내야지, 극복해야지, 이렇게 되곤 한다"고 했다. 6일 국회에서 피해를 증언한 고 최숙현 선수 동료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콜라를 한 잔 먹어 체중이 불었다는 이유로 빵 20만 원 어치 사와 먹고 토하도록 시켰다", "휴대폰을 검사하는 등 제3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해 감시 받았다", "감기 몸살이 걸려 몸이 좋지 않았는데 훈련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를 시켜 각목으로 폭행했다" 등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전문가들은 체육계에서 구타와 가혹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로 '성적 지상주의'를 꼽았다. 초·중·고·대학·실업팀 선수들은 단기간 성적을 내야 진학 및 취업이 결정된다. 지도자들도 자기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지속적으로 성적을 강요한다. 그러다 보니 위계질서가 강한 체육계에서 폭력이나 다름없는 체벌도 경기력 향상 수단으로 받아들인다. 선수들은 지속적인 폭행에도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부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법에 호소하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있다. 문제를 제기할 경우 종목 지도자들의 견고한 카르텔 안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보복으로 어린 시절부터 꿔 온 꿈에서 탈락하게 된다. 

성적지상주의와 견고한 카르텔 그리고 허울 뿐인 법과 제도가 선수들을 폭력 앞에 무방비로 내몰고 있다. 정부와 대한체육회 등 관련 기관의 체육계 폭력 근절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과 각오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박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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