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황지영] 배우 윤여정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찍으면서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수두룩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재용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할머니 성매매, 코피노 등 방대한 소재를 담아놓긴 했는데 잘 펼쳐낼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이 감독은 “영화 만들기 전까지 가장 힘들었다. 촬영 일주일 남겨놓고 프로듀서한테 ‘농담 아니고 나 정말 못해’라고 말했다. 꾸역꾸역 주위 도움으로 만들었는데 개봉해놓고 보니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안도했다.

-제목이 참 멋있다.
“애초에 방점은 늙음과 죽음에 두고 있었다. 그 소재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노년의 성매매를 집어넣었다.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니까 참 좋더라. 가제로 처음 정해놓고 ‘죽여주네’(멋있다)라고 생각했다. 영어 제목은 ‘The Bacchus Lady’(바쿠스 여인)인데 중의적 의미는 없지만 영화를 보면 해외 관객들도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바쿠스는 또 술의 신으로 쾌락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영화 내용과 맞는다.”

-사회적 약자들을 한데 모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처음에는 성을 팔아 할아버지들한테 아직 죽지 않았다는 기쁨을 주는 여자가 나중엔 그들을 정말 죽인다는 내용만 생각했다. 대기업 자본이 들어간 영화도 아니니까 오롯이 내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 사회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평소 관심이 있기도 했다.”

-영화 ‘여배우들’이나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 등 윤여정과 참신한 시도를 많이 한다.
“햇수로 치면 8년 알고 지낸 사이다. 그 연배에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관계가 쉽지 않은데, 우린 서양식 개념의 친구처럼 지낸다. 윤여정과 낄낄거리던 시절 ‘여배우들’을 만들었다. 여배우들이 그렇게 웃기는 꼴을 나만 보기 아깝더라. 꼭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시작한 프로젝트다.”

-이번 영화도 파격적이다. 윤여정을 염두에 두었나.
“다른 ‘윤여정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이든 여배우의 고충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찍게 되면서 우연하게 성매매 할머니에 관한 기사를 접했다. 즉각적으로 윤여정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녀는 대한민국 여배우들의 롤모델이자 패셔니스타로 불리는데 그녀 같은 당당한 성격의 여인이 고아로 태어나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궁금했다. 이 영화는 윤여정이 있어서 가능한 영화다. 아니었다면 새로 캐스팅을 어렵게 부탁해야 했을 텐데, 윤여정 선배님과 서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 당연히 해주시시라 생각했다.”

-극중 윤여정 코를 꼭 집어서 말하는 장면이 있던데.
“코가 평소에 이상하다고 생각한건 아니고, 선생님께서 평소에 그렇게 말씀하신다. 보통 콤플렉스라고 생각하면 그 부분을 감추는데 선생님은 오히려 다 꺼내놓는다. ‘내가 이런 굴욕을 당했잖니’라면서 굴욕도 다 털어놓으신다. 겉과 속이 투명한 분이다.”

-트랜스젠더 배역은 오디션까지 열었다고.
“대대적인 오디션은 아니었다. 그냥 소문을 내서 몇 분만 만나봤다. 영화에 캐스팅된 안아주 라는 분은 사진부터 느낌이 좋았다. 여자 나이를 막 밝혀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이 마흔인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이다. 우리 캐릭터와도 딱 맞았다. 연기는 처음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캐스팅하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반응이 좋은데 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을 소개해달라.
“우리 영화의 특징은 사소한 디테일이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감정을 만들어간다. ‘한 번 더 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극중 윤여정 선생님 과거 직업으로 식모가 언급되는데 전작이었던 영화 ‘하녀’를 염두해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역사를 쭉 훑어보는 기분도 든다.
“소영(윤여정)은 한국전쟁 때 태어난 전쟁고아다. ‘38따라지’(6·25 전쟁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탈출해 온 탈북민)로 남의 집 식모살이도 하고 공장에서도 일하고 그러다 미군부대까지 흘러가 몸을 팔게 됐다. 거기서 흑인 군인을 만나 살다가 애를 낳았지만 없는 형편이라 애를 어쩔 수 없이 국제입양을 보낸다. 그렇게 살다 나이가 들어 종로 탑골공원에서 성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가 된다. 이 과정에서 조계사로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 등 최근의 일들까지 스쳐지나간다. 영화는 일종의 타임캡슐 역할을 한가고 생각한다. 일종의 역사의 기록물이랄까.”

-대사들도 재미있다. ‘계산 도와드린다’는 장면에서 다들 웃음이 터졌다.
“내가 평상시 즐겨 쓰는 대사들 위주로 구성했다. 식당이나 어디 가서 점원이 ‘정리 도와드릴게요’ ‘계산 도와드릴게요’라고 말하면 내가 ‘뭘 도와주느냐. 알아서 정리하시는 거고, 계산 하시는거다’ 이렇게 응수한다. 잘못된 높임말이나 압존법 때문에 말이 오염되고 있다. 윤여정 선생님 그런 대사을 당연히 잘 표현해 줄거라 믿었고 역시나 그랬다.”

-영화의 메시지가 잘 전달됐다고 생각하나.
“촬영 날짜를 받아놓고 몇 번이나 포기할까 했다. 우리 영화에 나오는 노년의 애환과 죽음은 현실이다. 그 현실과 우리 영화과 연관돼 더 부각된다면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에 짓눌렸다. 실제 우리 사회는 너무 빨리 고령화가 되어 있고 가족체계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다. 가족에게 헌신한 노인, 나 몰라라 하는 자녀들 요즘 뉴스에 쉽게 접할 수 있다. 언젠가 시한폭탄처럼 터질지 모르는 노인문제를 공론화 하고 싶었다. ‘잘 죽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죽는 것도 살면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진=이호형 기자

황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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