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양지원 기자] 매 작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캐릭터를 소화한 이정은이 이번에는 대사 없는 캐릭터에 도전했다. 영화 ‘내가 죽던 날’(12일 개봉)에서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으로 분해 오직 표정과 행동만으로 캐릭터를 표현했다. 지난 해 영화 ‘기생충’에서 문광 역으로 잊을 수 없는 연기를 펼친 이정은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모성 연기를, ‘한 번 다녀왔습니다’에서는 눈에 띄는 비주얼과 러브라인으로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1991년 연극 ‘한 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한 이정은은 30년 만에 대중을 사로잡는 배우가 됐다. 이정은은 “배우로서 늦게 성장을 하다 보니 저를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는 것 같다”며 “어떤 평가도 달게 받으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내가 죽던 날’의 어떤 점에 끌려 출연하게 됐나.

“시나리오가 개발될 때부터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러한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고 기회가 된다면 출연해달라고 제안 받았다. 주인공이 김혜수로 결정됐는데 좋은 배우와 함께 하면 즐거운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대사가 없는 캐릭터라 표현하기 힘들었을 텐데.

“상대방의 말을 잘 들으려고 했다. 잘 듣고 반응하는 게 중요했다. 감독님과 많은 상의를 했는데 힘을 빼고 연기하라고 하셨다. 사실 얼굴 주름이 많았으면 했는데 통통한 내 얼굴로는 안 되더라. (웃음) 분장을 더 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연기를 했지만 아쉽기도 했다.”

-순천댁은 자신을 위해 산 적이 없는 인물인데 어떻게 봤나.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조카가 한 명 있는데 머리도 똑똑하고 집안의 자랑이다. 만약 내 오빠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면 내가 돌봐야 하지 않나. 그럴 때 내 삶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했다. 내 연배 정도 되니 괜찮게 산 것 같다.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불행은 더 큰 시련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댁은 조카를 돌보고 그런 일상이 그냥 삶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김혜수가 ‘위로를 많이 받는 배우’라고 칭찬했는데 어떤 감정을 나눴나.

“결정해놓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물처럼 흘러가는 경우가 있다. 서로 액션과 리액션이 좋았다고 생각이 든다. 드라마틱한 순간이 좋은 것도 있지만, 그걸 담담하게 담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게 너무 좋은 것 같다. 젊었을 때부터 김혜수도 나의 작업물을 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고, 나도 김혜수가 영화에서 걸어온 행보에 대해 늘 관심이 많았다. 김혜수가 주변 배우들에게 참 잘한다. 좋은 배우를 추천하고 응원하고 모르는 배우한테 커피차를 보내기도 한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같이 공감하는 배우들에 대한 격려이고 독려인 것 같다. 여유가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이 부자다.”

-연기하는 캐릭터들이 다 전형적이지 않은 느낌이다.

“시나리오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내게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 같다. 내가 두각을 나타나게 됐을 때 이미 시나리오의 격이 달라져 있었다. 점점 더 다양화될 것 같다. 대본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시나리오에서 어떻게 인물의 겹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옛날보다는 확실히 전형적이지 않다. 도움이 많이 됐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이 든다.”

-극 중 ‘네 생각보다 인생은 길다’는 대사가 있는데 많은 이들을 위로하는 느낌이다.

“실제로 배우로서 위기를 느꼈을 때 몸이 아픈 적이 있었다. 당시 한의사 선생님이 똑같은 말을 했다. 나 혼자 낑낑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더라. 시나리오에 내가 들은 말이 똑같이 써져 있는 걸 보고 사람들의 생각은 다 비슷하다고 느꼈다. 낙담하는 순간도 결국 다 지나가지 않나. 그 대사는 꼭 빼지 말자고 했다.”

-‘기생충’을 통해 세계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겁이 났다. 마음이 자만할까 싶었다’라는 말을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다행히 자만은 안 했더라. 일상으로 잘 돌아올 수 있었다. ‘기생충’은 금쪽같은 행운의 시간이었다고 본다. 그 시간이 있었던만큼 남에게 잘 베풀고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작품이 계속 연타로 좋을 순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격려도 많이 받았다. ‘이제 좀 놀아’라는 말도 듣고, ‘그런 마음도 이해간다’면서 이미 겪으신 선배들이 측은하게 봐주시기도 했다. 늦게 성장하다 보니 들뜨고 그렇진 않을 거라고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때 조여정과도 얘기를 많이 했다. 조여정도 침착한 편인데 둘 다 그런 성격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양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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