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카타르 도하 마스터스 대회 참가한 모습. /현숙희 씨 제공

[한스경제=글렌다박 기자] 올림픽은 수많은 스포츠 선수들에겐 꿈의 무대이다. 각기 다른 이유에서 나라별로, 종목별로, 선수들은 ‘올림픽’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회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은 메달 획득 여부에 상관없이 ‘Olympian’(올림피언)이라는 호칭을 쓸 수 있다. 국내에서는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경우 종종 그 배경을 바탕으로 국내 국가대표 지도자로 선출되어 올림픽 무대에 다시 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국가대표 선수 은퇴 후에도 20년 넘게 국제무대에서 여러 나라의 ‘대표’들과 치열하게 경쟁하여 올림픽을 출전한 사례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지난 2월, 도쿄 올림픽 유도 종목의 심판으로 최종 선발된 16명 중 유일한 한국 심판, 현숙희 선생을 만나보았다.

◆ 하면 할수록 흥미 있었던 유도

현숙희 선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육상을 시작해 서울체육중학교 입학 당시 육상 종목에서 수석 합격했던 전도유망한 육상선수였다. 입학과 동시에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합숙 훈련이 시작되었다. 학기 초, 육상부로 입학하였으나 여러 종목을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여자유도가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어 전망도 좋으며, 발전적일뿐더러, 체력도 좋으니 유도를 시작하는 것은 어떻겠냐?’라는 진로 담당 교사의 권유로 유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하는 유도는 어색하고 기분도 떨떠름했지만 하면 할수록 흥미가 생겼다. 그는 그렇게 서울체중 1학년 때 육상에서 유도로 본격적으로 종목을 전환하여 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도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현숙희 선생은 선배들과 5인조 무차별 단체전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첫 공식 대회 출전’이었다.

“5인조 단체전이지만 선배들이 네 명 밖에 되지 않아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선생님이 넣어주신 것 같아요.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상대편이었던 중3 선수에게 누르기 한판으로 허무하게 패하고 나왔습니다. (웃음) 이후 열심히 동계훈련을 마치고 중학교 2학년이 되어 3월에 열린 춘계연맹전에서 개인전 1위를 했습니다. 배운 대로 누르기를 하고, 한판으로 던지고. 그렇게 이겨 나가다 보니, ‘유도는 나에게 정말 딱 맞는 길’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현숙희 선생은 중학교 3학년 때 중등부 국내 1위를 하는 등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도 입문 3년 후인 1989년,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촌하게 되었다.

◆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현숙희 선생은 10여 년의 국가대표 선수 생활 동안 가장 의미 깊었던 대회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을 꼽는다. 1993년 아시아선수권대회 1위, 1993년 대한민국 체육훈장의 수훈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출전 이전 그녀는 선수로서 꾸준히 수상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은 현숙희 선생이 출전한 국가대항전 중에서도 최다 종목에서 최대 규모의 선수가 출전한 대회였으며, 그는 이 대회에서 ‘생방송 경기 중계’를 처음 경험했다.

1994년의 여름은 어느 때보다 지독한 폭염이었다. 52kg급인 현숙희 선생은 훈련이 마치고 나면 49kg으로 미달이 되었을 만큼 고되고 지독하게 훈련했다. 아시안게임을 위해 히로시마 현지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언제보다 더 간절하게 ‘금메달을 따게 해달라’라고 기도했다. 한 경기, 한 경기 이기며 결승에 올라갔을 때, 그는 일본의 다케다 선수를 마주했다. 다케다 선수는 전년도 경기에서 현숙희 선생이 형편없이 졌던 상대였다. 순간적으로 눈빛이 타올랐다. 보란 듯이 일본의 홈그라운드에서 일본 선수를 멋지게 한판으로 넘겨서 이겼다.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경기장에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현숙희 선생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경기장에 응원을 왔던 한국인들과 재일교민들이었다. 당시, 히로시마 원자 폭격으로 인해 신체를 잃었던 교민들이 휠체어를 타고 경기장에 응원을 와서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히 응원했다. “얼마나 마음이 미어졌는지 ‘꼭! 우승해서 애국가를 울려야겠다!’ 생각하며 대회에 임했습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현숙희 선생은 1995년 유니버시아드대회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 1994년, 1995년, 1996년 독일 국제오픈 유대회 3연패 등 국제 대회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 그 외 1993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상, 1994년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훈하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현숙희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선수 시절 현숙희 씨의 모습. /MBC 방송화면 캡처

◆ 올림픽 은메달이 더 감사한 이유

“선수로서 올림픽은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게 올림픽 은메달 획득은 금메달보다 값집니다. 이 은메달 획득으로 인해 지금의 제가 더 인정받고, 이 자리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현숙희 선생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선발전에서 2위를 하면서 첫 올림픽 출전에 대한 가슴 아픈 실패를 겪었다. 독실한 기독교인 그녀에게 ‘고난도 유익’이라는 성경 말씀이 위로로 와 닿았다.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출전’이라는 목표 앞에 ‘인생’을 걸었다. 훈련도, 체중조절도, 독기어린 마음으로 했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올림픽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발등 부상을 당해 현숙희 선생의 올림픽 출전 여부를 두고 임원진과 지도자를 포함한 담당자들의 회의가 여러 번 오갔다. 그녀를 전적으로 믿고 끝까지 ‘올림픽에 출전 시켜야 한다’라고 강력히 밀어붙인 당시 국가대표 김관현 감독(전 용인대학교 무도학장)의 의지 덕분에 현숙희 선생은 부상을 치료하면서 애틀랜타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올림픽 출전 전까지도 그의 몸은 온전치 않았다. 발은 퉁퉁 부어 신발을 못 신을 정도였다.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텼다. 경기 출전이 기적적으로 느껴질 때쯤 현숙희 선생은 어느새 결승에 올라와 있었다. ‘정신력’으로 치른 경기였다. 결승전에서 그는 프랑스의 레트로 선수를 만났다. 결국, 패하여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그는 매트에서 모든 것을 바친 경기를 펼쳤기에 후회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

“경기 결과로는 졌지만, 저는 제가 진 경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 저를 믿고 도와주신 김관현 감독님, 이경근 코치님 외 스테프 분들께 금메달을 걸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있어요. 그러나 부상 중에도 신께 바라기를 ‘금, 은, 동메달 중 단 한 개만이라도 제 목에 걸게 해주신다면 제가 앞으로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라며 기도했기에 은메달을 획득한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습니다.”

1996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회의 풍토가 1등만이 박수받던 시절이었기에 국가대표 선수들은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하면 시상식에서 시상대에 올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현숙희 선생은 당당하게 올라가 손을 흔들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현숙희 선생도 상대적으로 당시 세계 랭킹 7, 8위밖에 안 되었던 선수가 은메달을 딴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 알기에 감사했고 기뻤다.

“이 메달 획득은 저를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서 인정받게 했고, 저 또한 공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라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경험은 어떤 힘든 일이 생겨도 제가 지난날 힘들었던 시간을 돌아보며 이겨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되는 것 같습니다.”

현숙희 선생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이 인생을 바꾸어준 ‘삶의 백과사전’이라 말한다. 사전에 ‘노력’이라는 단어의 뜻, ‘최선’이라는 단어의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힘들 때 이겨내야 한다’, ‘이겨냈기에 올림픽 메달이 주어진 것이다’라는 삶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는 것이다. 삶에서 때때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나 장애물에 봉착하겠지만, 그는 살면서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반드시 성공이라는 정답이 온다’라는 확신을 하고 살아간다.

“제자들에게도 저는 말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노력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성공이 돌아온다고. 조금 늦어질 수는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꼭! 올 거라고요.”

◆ 시행착오를 겪은 훈련법, 최고의 지도자 밑거름

애틀랜타 올림픽이 있었던 1996년 그는 같은 해 파리 국제오픈 유도대회 은메달, 오스트리아 국제오픈 유도대회 은메달, 후쿠오카 국제유도대회 동메달, 1997년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을 수상하는 등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1998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훈 받았다. 서울체육고등학교 시절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국내외 대회에 출전하고, 훈련하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던 현숙희 선생은 용인대학교 유도학과를 졸업하고 국민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석사과정을 입학해 1998년 국가대표 선수 은퇴와 동시에 석사학위 수여를 받았다. ‘국가대표는 운동만 한다’라는 편견을 깨고 ‘공부하는 국가대표’가 된 본보기였다.

선수 은퇴 후, 이듬해 현숙희 선생은 서울 광영여자고등학교 유도지도교사로 부임했다. 유도부에는 선수가 3명밖에 없었고 선수들의 실력도 초보 수준이었다. 당시 감독이었던 전 광영여고 박종양 교장은 현숙희 선생에게 ‘올림픽까지 가서 메달 딴 사람이 금메달 못 만들면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아니지’라며 자극했다. 선수들을 대할 때마다 그 말이 귓가에 울렸다. 선수들에게 정신없이 강도 있는 훈련을 시켰다. 초보자인 선수들을 데리고 속성으로 성적을 내려니 마음이 급하고 답답해서 엄하게 가르쳤다. ‘안되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한다’라며 외치기도 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후유증이 터졌다. 그나마 남은 선수 3명도 그만둔다고 나선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명하지 못한 지도 방법이었죠. 지금 선수들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거예요. 그 시절 선수들을 가르치는데 선수가 기량이나 장래성이 매우 좋은 게 눈에 보여서 훈련 강도를 높였더니 학교를 이탈해서 없어졌어요. 부모님들이 수소문하여 학교로 데려와서 제가 상담하면서 진심 어린 사과를 했던 적도 있습니다.”

현숙희 선생은 이러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더 나은 지도력을 익히고, 배우고, 쌓아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도부 선수들은 늘어갔다. 현숙희 선생이 선수를 처음 대면할 때 중요시하는 점은 먼저 상담을 하여 장단점 등 정확한 장래성을 짚어 주고 훈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격려를 해주는 것이다. 또한, 선수들이 여고생인 만큼 지도자가 힘든 훈련에 대한 감정에 대해 공감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라고, ‘선생님도 노력할 테니, 대신 00이도 최선을 다해 달라’라고 말을 합니다. 또한, 가고 싶은 대학에 대해 목표를 정하고 ‘함께 달려가자’라고 합니다.”

현숙희 선생은 학생 본인의 계획과 확실한 목표를 직접 세우는 것을 지도한다. 후에는 그 계획을 실천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가르친다. 그녀가 늘 강조하는 것은 ‘언행일치’이다. 말이 말로만 될 수 없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광영여고 유도부를 지난 15년간 우승을 놓치지 않은 훌륭한 팀으로 이끌어 2005년 서울시 교육감 우수지도자상, 2017년 대한유도회 우수지도자상을 수상한 현숙희 선생의 지도 비결이다.

2편에 계속됩니다!

 

글렌다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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