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 창업주인 율촌 신춘호 회장이 27일 별세했다. 향년 92세./농심 제공

[한스경제=강한빛 기자]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참 어렵게 꾸려왔다.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고 한여름 가마솥 옆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내 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같다" - 신춘호 회장 저서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 중

농심 창업주 신춘호 회장이 지난 27일 영면에 들었다. 향년 92세. '한국인의 맛'에 주목해 라면과 과자 개발에 몰입,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신라면'을 개발해 ‘라면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1930년 12월 울산에서 태어난 신 회장은 롯데그룹 창업주인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이다.

1958년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고 신격호 회장을 도와 제과 사업을 시작했다가 1963년부터 사업을 모색, 1965년 농심을 창업한 이후 56년 동안 회사를 이끌어왔다.

신 회장은 창업 당시 “한국에서의 라면은 주식이어야 하며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한다”며 “이런 제품이라면 우리의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범국가적인 혼분식 장려운동도 있으니 사업 전망도 밝다”고 내다봤다.

‘우리 손으로 우리 먹거리를 만들자’는 신춘호 회장의 경영 철학에 따라 농심은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두며 독자적인 라면 개발에 몰입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구개발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자"는 생각에서다. 실제 1971년 새우깡 개발 당시 4.5t 트럭 80여 대 물량의 밀가루가 사용됐다. 

신 회장은 일찍이 브랜드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1970년 ‘짜장면’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유명 조리장을 초빙해 요리법을 배우고 7개월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내놓은 국내 최초 짜장라면 ‘짜장면’은 출시 초기 흥행에 성공했지만, 비슷한 이름으로 급조된 ‘미투 제품’의 낮은 품질에 불만을 느낀 소비자들은 짜장라면 전체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결국 농심의 짜장면도 시장에서 사라지게 됐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제품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로 확실한 차별화 전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간결하지만 차별화된, 농심만의 특징을 담아내는 데 주목했다. 대표 제품 '신라면' 역시 매운 맛을 직관적이고 간결하게 전할 수 있도록 ‘매울 辛’으로 하자는 신 회장의 생각에서 탄생했다.

이후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을 만들며 차별화된 브랜드 구축에 몰입했다.

신 회장의 마지막 작품은 옥수수깡이다. 신춘호 회장은 “원재료를 강조한 새우깡이나, 감자깡, 고구마깡 등이 있고, 이 제품도 다르지 않으니 옥수수깡이 좋겠다”고 했다.

현재 ‘K-라면’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신라면이 있기까지 신 회장의 전략이 주효했다. 맛과 포장 변화 없이 한국인의 맛을 온전히 전하고, 이를 통해 신라면의 세계화가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농심이 라면을 처음 수출한 것은 창업 6년만인 1971년부터다. 지금은 세계 100여 개국에 농심이 만든 라면을 공급하고 있다.

특히 2011년 출시된 신라면블랙은 지난해 뉴욕타임즈가 꼽은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오르며 이름을 빛냈다. 농심은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가운데 전체 매출의 40%를 해외에서 달성했다.

한편, 신춘호 회장은 유족에게는 ‘가족간에 우애하라’, 임직원에게는 ‘거짓없는 최고의 품질로 세계속의 농심을 키워라’라는 당부의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더불어 별세하기 전 오랫동안 치료해온 의료진과 병원 측에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서울대 병원에 10억원을 기부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이며 발인은 30일이다. 장지는 경남 밀양 선영이다.

강한빛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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