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축구 한일전에서 황선홍(맨 왼쪽)이 거친 몸 싸움을 하고 있다. /KFA 제공

[한스경제=박종민 기자] ‘라떼(나 때)는 말이야.’

통산 80번째 축구 한일전 참패(0-3)를 보고 불현듯 떠오른 말이다. 선수로 따지면 이미 국가대표 은퇴를 했어야 할 나이인 기자는 25일 열린 축구 한일전을 보고 20~30년 전 기억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1990년대 TV 중계를 통해 지켜봤던 축구 한일전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일전이 열리는 날이면 학교에서도 온통 축구 얘기뿐이었다. 한국엔 최용수(50), 일본엔 미우라 가즈요시(54)로 대표되던 1990년대 중반 한일전은 축구 그 이상의 ‘문화 현상’이었다. 2002년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수준까진 아니지만, 한일전에서 한국 선수가 골을 넣을 땐 아파트 곳곳에서 큰 소리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처럼 다양한 놀이 문화가 형성되지도 않았고, 디지털 플랫폼이 대중화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 스마트폰 등 그 시절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땐 TV가 왕이었다. 1997년 KBS 인기 드라마 ‘첫사랑’의 마지막 회 시청률이 무려 65.8%를 찍을 때였다. 브라운관 TV를 타고 안방으로 전해지던 축구 한일전은 당시 외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국가간 전쟁 수준으로 비화됐다. ‘도쿄 대첩’,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등 어록들이 괜히 생긴 말은 아닌 것이다.

김대길(55) KBSN 스포츠 축구 해설위원은 이번 한일전 전날 기자에게 “축구로만 해석할 수 없는 대결이다. 양국의 정치, 사회 등과 관련해 결과를 복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이라 중요한 경기다”라고 말했다. “패배하는 쪽은 치명적일 수 있다”는 그의 말대로 파울루 벤투(52)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정몽규(59) 대한축구협회(KFA) 회장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다. 정몽규 회장은 “부족한 경기력으로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축구 한일전 때 양국 국기의 모습. /KFA 제공

이번 한일전의 소득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대결 명분부터 행정 준비, 경기력, 정신력 등에서 사실상 일본에 완패했다. 경기 성사 시점부터 우려의 말들이 나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상황에서 굳이 일본 원정 친선전을 열어야 하느냐’라는 물음표가 쏟아졌다. 일본축구협회(JFA)의 제안을 카타르 월드컵 2차 예선 일정이 연기된 벤투호가 받아들이면서 급히 성사된 한일전이었다.

부상 선수 속출, 해외 클럽들의 선수 차출 거부 등으로 대표팀은 선수 구성에 애를 먹었다. 손흥민(29ㆍ토트넘 홋스퍼), 황의조(29ㆍ지롱댕 드 보르도), 황희찬(25ㆍRB라이프치히) 등 주축 선수들이 빠져 사실상 ‘2군’에 가까운 팀으로 일본을 상대해야 했다. 제대로 된 전력 점검은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한국은 유효슈팅 수에서 1-9로 압도당했다. 정몽규 회장은 “(벤투 감독의 책임보다) 최상의 상태로 경기를 치르도록 완벽하게 지원하지 못한 축구협회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주축 선수들이 빠질 수 있고, 경기에서 질 수도 있다. 그리고 슈팅이 유난히 골대를 외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자가 가장 실망한 부분은 다름 아닌 선수들의 ‘정신력’이었다. 뇌는 움직임을 지배하곤 한다. 그라운드 위 선수들의 활동량과 움직임은 결국 ‘정신력’에서 나온다. 이번 한일전에 나선 한국 선수들의 움직임에는 ‘혼(魂)’이 빠져 있었다. 거친 몸 싸움을 마다하지 않거나 한 발 더 뛰고자 하는 움직임이 부족했다.

일본에 패하며 실망하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모습. /KFA 제공

예로부터 한일전의 묘미는 ‘정신력 싸움’이었다. 선수들간 신경전과 거친 몸 싸움 등은 한일전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았다. 유럽, 남미 등 축구 선진국들이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 수 아래인 한국을 상대할 때 늘 긴장했던 이유도 바로 ‘근성’이었다.

1980년대부터 한국 축구 대표팀의 경기 현장을 취재해왔던 한 선배는 이번 한일전과 관련해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경기를 한 것 같다. 이런 경기는 왜 해야 했나. 스코어는 0-3이지만, 경기 내용은 0-6의 치욕이었다”고 혀를 찼다. 아버지 세대인 선배는 기자보다도 더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떠올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스포츠신문인 스포츠호치 보도에 따르면 재일 동포이자 야구 전설인 장훈(81)은 28일 오전 한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 축구가 7~8년 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박력 없는 축구 한일전은 처음 봤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는 눈은 똑같다. 기대를 모았던 80번째 축구 한일전은 한국 입장에선 ‘요코하마 참사’로 기록됐다. 한국 축구의 무기력한 움직임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은 ‘꼰대(권위적인 사고 방식의 어른들을 비하하는 젊은 세대의 은어) 발언’의 전형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이번 한일전과 관련해서 만큼은 예외다.

 

박종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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