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버렛 밀레이 작, ‘나의 첫 설교’ 1862년, 길드홀 아트 갤러리 소장
존 에버렛 밀레이 작, ‘나의 첫 설교’ 1862년, 길드홀 아트 갤러리 소장

[한스경제=유아정 기자] 당장이라도 눈에서 레이저를 쏠 듯 목사님 말씀에 초집중하고 있는 꼬마 아가씨를 보라.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나의 첫 설교’라는 그림 속 모델은 화가의 첫째 딸인 다섯 살 난 에피다. 자고로 교회란 예로부터 사교의 장이었다. 그에 걸맞게 에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뭐하나 예사로운 게 없다. 21세기에 둘러도 어색함이 없을 법한 빨간색 모직 망토는 물론 멋들어진 깃털모자가 아름답다. 뭐니뭐니 해도 화룡정점은 손에 낀 모피 머프다. 당시 유행하던 비버 털로 만들어졌음직한 머프 덕분에 이 날이 에피에게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작품이 그려진 빅토리아 시대는 말 그대로 모피 광풍이 불던 시대다. 그동안 실크로 만들던 신사용 모자까지 비버 털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 같은 모피 광풍이 털 두른 동물들의 무차별적 죽음을 야기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유행 품목이었던 유럽산 비버의 씨가 말랐다. 1720년까지 북미 동부에서 죽은 비버의 숫자는 200만 마리를 훌쩍 넘겼다. 비버가 몰살당하자 19세기에는 물개가, 20세기 초에는 검은 여우가 차례로 희생양이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잔인한 인간은 패션을 위한 모피용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냥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내 몸 하나 따뜻하게 하고자 다른 동물을 죽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오랜 시간 부티와 귀티의 최절정이었던 모피에 대한 불편함이 고개를 들면서 사고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언제부터인가 모피가 부티의 상징이 아니라 잔인함과 이기심의 발로로 여겨졌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앞 다투어 인조모피를 사용하는 것도 이 같은 트렌드에 힘을 실었다.

세계적인 패션브랜드 버버리는 일찌감치 모피 사용 중단 계획을 밝혔다. 2024년까지 120t의 남은 가죽을 재활용해 신제품을 생산하고 지속 가능한 재료 개발을 위해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CA)와 연구 그룹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명품브랜드 구찌도 모피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밍크, 여우, 토끼, 너구리 등의 동물 모피 제품 생산을 중단하겠다는 것. 지난 2018년 봄 컬렉션에 재고가 남은 모피 제품은 자선 경매로 판매됐으며, 경매에서 모금된 돈은 자선단체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샤넬 역시 앞으로 동물의 털과 희귀동물의 가죽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동물 애호가로 유명한 스텔라 매카트니는 지난 2001년부터 가죽과 퍼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리사이클폴리백으로 포장한 의류. F&F 제공
리사이클폴리백으로 포장한 의류. F&F 제공

소재에 대한 고민 뿐 아니라 만들어진 옷의 재고 관리와 폐기 방식에 대한 고민도 친환경 결실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 패션브랜드 한섬은 2021년부터 업계 처음으로 재고 의류를 폐기하는 방식을 친환경 방식으로 바꿨다. 재고 의류는 소각되는 것이 아니라 폐의류 재활용기업을 통해 고온·고압 과정을 거쳐 친환경 인테리어 마감재로 거듭난다. 한섬은 "30톤 가량의 재고 의류를 '탄소 제로 프로젝트'를 통해 친환경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며 "그동안 브랜드 관리 차원에서 매년 신제품 출시 후 3년이 지난 재고 의류 60톤 가량의 8만여 벌을 소각해 폐기해왔으나, 처리 방식을 바꿔 2021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약 72톤 줄였다. 앞으로 매년 144톤 가량의 배출량을 감축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감축량은 30년산 소나무 2만여 그루를 심는 것과 맞먹는다.

패션업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움직임은 ESG 경영에서 우수한 성적표로 확인되었다. 지난달 29일 발표한 한국ESG기준원에 따르면 올해 상장 패션 기업 19개 기업 중 F&F홀딩스, 신세계인터내셔날, 한섬 등 5개는 A(우수)등급을, LF와 코오롱인더, 한세실업 등 3개는 B+(양호)등급을 받았다. F&F홀딩스 관계자는 "친환경 쇼핑백을 도입했고 폐기 예정인 재고 의류로 리사이클(재활용) 가구를 제작, 기부한 점 등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며 "ESG 협의체 등 실무조직을 구성해 ESG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고 설명했다.

태초에 인류가 모피를 사용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외부로부터 살갗을 보호하고 보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현대에 이르러 모피는 욕망과 과시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모피는 부의 과시도, 보온력을 위함도 아니다. 재활용 가능한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진 가짜 모피야 말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아이템으로 추앙받는 시대다. 밀레이가 오늘날 그림을 그렸다면 #모피머프 #인조모피 #지속가능한패션 #ESG를 해시태그로 달았을지 모를 일이다.

 

 

유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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