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1224조 규모 수탁고...단순 판매채널서 확장위해 제도 개선 필요

[한스경제=박종훈 기자]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와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종합 노후자산관리 수단은 물론, 중소기업이나 혁신기업의 자금조달 방법으로 애용되는 신탁 시장 활성화를 위해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는 일본 금융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2년 신탁업 영업현황 분석 현황을 보면 2022년 기준, 국내 신탁 수탁고는 1224조원으로 이는 GDP 대비 약 57% 수준이다. 금전신탁이 48.2%이고 부동산신탁이 37.6%, 기타재산신탁이 14.1%로 구성돼 있다.

2022년 말 기준, 신탁업 영위회사는 모두 60곳이다. 업권별로 보면 겸업인 은행이 18개, 증권사가 21개, 보험사가 7개며 전업 부동산신탁사는 14개다.

인가 단위별 기준으로는 종합신탁업이 38개사며, 부동산신탁업 14개사, 금전신탁업 8개사다. 종합신탁업자는 업권별로 부동산신탁 업무 일부가 제한되고, 부동산신탁업자는 부동산만 수탁 가능하다.

업자별 신탁 수탁고 비중으로 보면 은행이 44.3%로 가장 비중이 크다. 이어 부동산신탁사가 32.0%, 증권사 22.1%, 보험사 1.6% 순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탁은 활용에 따라 금융소비자들에게도, 신탁업자들에게도 유용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신탁시장은 금융상품 판매 목적의 금전신탁과 개발사업·담보대출 등, 부동산신탁 위주로 치우쳐 발전했다. 

인구구조가 고령화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근 세태에서 신탁은 시대상에 가장 적합한 자산관리수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령 상속·증여·기부 등, 재산권 이전은 3자 계약구조를 지니는 신탁에서만 원스톱으로 가능하다. 또한 신탁은 다양한 유형의 자산을 한번에 위탁할 수 있는 편의성이 있고, 수탁자에게 명의(소유권)가 이전돼 도산 위험에서 절연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자본시장법상 수탁가능재산 범위가 7종으로 한정되고 있다. 이는 금전·증권·금전채권·동산·부동산·부동산 관련 권리·무체재산권(지식재산권 포함) 등이다. 특히 대부분 자산은 담보대출과 같은 채무가 결부돼 있는데, 현행법상 채무의 신탁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런 부분만 봐도 제도적 한계 때문에 신탁의 많은 가능성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인데, 개선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금융위원회는 2022년 10월 신탁업 혁신방안을 발표하고 앞서 언급한 문제점 등에 대한 해결방안 모색과 제도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아직까지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그에 반해 일본 금융권의 신탁 활용과 신탁 시장 및 경쟁력 고도화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양국의 상황을 1:1로 비교하긴 무리지만, 무엇보다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 변화 이슈를 사회적으로 뒤따라 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감안하면 시사점이 많다.

일본의 경우,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신탁 상품 수요가 증가하면서 2000년대 초반 발빠르게 우호적인 제도개혁을 단행해 신탁 수탁고가 양적·질적으로 급성장했다. 가령 2000년에 재신탁을 허용했으며, 2004년과 2006년 신탁업법을 개정했고, 2013년 이후엔 증여세 혜택을 강화했다.

여기서 재신탁이란 신탁사가 위탁받은 재산을 또 다른 신탁회사에 위탁하는 걸 말한다. 재신탁을 하는 곳은 소극적 운용이나 보관관리 업무를 주로 하는 관리형 신탁으로 선택의 폭이 늘었으며 재신탁사는 포괄신탁 위주로 영업을 확대하면서 결국 시장의 파이가 커졌다.

이에 일본의 GDP 대비 신탁 수탁고 규모는 2020년 기준으로 173%에 달한다. 퍼센티지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세 배 이상인 것이다. 이 중 2022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종합재산신탁과 유사한 포괄신탁이 57.7%를 차지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이가 커졌다는 거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단일계약으로 금전·부동산 등, 재산을 통합해 수탁하는 종합재산신탁 비중이 0.05%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시장 자체가 미성숙하다는 말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일본에선 정부 주도로 고령층에 집중된 가계자산의 순환을 위해 2013년 세제혜택이 부여된 교육자금증여신탁이, 2015년엔 결혼·육아지원신탁이 활성화됐다. 예를 들어 30세 미만 손·자녀의 교육비를 지원하는교육자금증여신탁은 1인당 1500만엔, 20~49세 손·자녀의 결혼과 육아를 돕는 결혼·육아지원신탁은 1000만엔까지 증여세 비과세 혜택을 준다. 더불어 사회복지 목적의 공익신탁도 도입됐다.

교육자금증여신탁은 누적계약 수가 2014년부터 2022년 사이 연평균 16.4%나 급증했다. 결혼·육아지원신탁은 2016년~2022년 사이 연평균 7.9%가 증가했다. 이는 각각 26만 2159건에 1만 9839억엔, 7591건에 236억엔에 달하는 규모다.

일본 신탁 시장은 3대 신탁은행과 이들이 지분을 보유한 2대 재신탁은행이 시장의 92%를 점유한 사실상 과점 체제다. 우리나라는 앞서 언급처럼 은행・증권・보험 등 겸영 신탁사와 부동산신탁사로 구분되며, 재신탁이 허용되지 않기에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일본 3대 신탁은행은 미쓰비시 UFJ(MUFG) 신탁은행, 스미모토 미쓰이(SuMi) 신탁은행, 미즈호 신탁은행으로 이들이 약 40% 점유율을 차지한다. 또한 2대 재신탁은행은 마스터 신탁은행과 커스터디 은행이다. 

마스터 신탁은행은 MUFG 신탁은행이 46.5%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커스터디 은행은 스미모토 미쓰이 트러스트 홀딩스가 33.3%, 미즈호 금융그룹이 27.0% 지분을 가진 대주주다. 신탁시장의 52% 점유율을 갖고 있는 양 재신탁은행의 신탁재산 잔액 규모는 2022년 기준 마스터가 432조엔, 커스터디가 418조엔에 달한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김신진 연구원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일본 3대 신탁은행 중 MUFG 신탁은행은 2022년 3월 신탁재산 규모 1위로 올라선 이후 경쟁사와 격차를 확대하고 있다고 한다. MUFG의 신탁재산 연평균성장률은 2019년부터 2022년 사이 8.8%이다. 경쟁사인 미즈호는 7.3%, SuMi는 4.9%로 이들 역시 꾸준한 성장을 보였으나 확연히 앞서가는 게 사실이다. 액수로 보자면 2018년 말에 비해 2022년 말 신탁재산 증가 규모가 MUFG는 77조 9000억엔, SuMi가 44조 9000억엔, 미즈호가 24조 4000억엔이다.

신탁재산이 증가하니까 자연스레 신탁수수료도 성장했다. MUFG의 경우 같은 기간 연평균 수수료 성장률이 3.1%에 달한다. 이는 1092억엔에 달하는 비이자수익 확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한화로 1조원에 육박하는 규모다.

MUFG가 경쟁우위를 가져온 데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지만, 특히 최근 들어 주목할 만한 점은 디지털화 전략을 잘 구가했다는 것이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MUFG는 디지털 무료 플랫폼을 통한 유언신탁 고객화 전용 앱을 통한 치매신탁 차별화 업계 최초 DC형 연금관리 앱을 통한 임직원 고객 확보 그룹 통합 WM 디지털 인프라로 사업·자산승계 전문성 강화에 주력한 점이 주효했다고 한다.

세부적으로 참고할 만한 점은 유언신탁의 잠재고객인 고령층과 그 가족(후손)을 대상으로 ‘웰다잉' 니즈를 다루는 스마트폰 앱을 무료로 제공하며 장기적 고객관계를 구축했다는 사례다. MUFG는 2020년 9월 고령층이 재산내역 등 정보를 사진·동영상·음성 등으로 손쉽게 입력해 ‘엔딩노트'를 작성하고 가족들과 공유하는 플랫폼 ‘우리집노트 by MUFG’를 출시했다.

일본인들은 고령자들이 인생을 충실히 마무리하기 위해 행하는 활동, 이른바 ‘종활(終活)’과 관련한 문화가 발달해 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식으로 유언장 작성 등, ‘엔딩노트'를 수기로 작성할 때는 수정이 불편하고 보관상 어려움이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실제 엔딩노트에 대해 조사해 보니 인지도는 90% 이상으로 매우 높았지만, 실제 작성 비중은 10%에 불과하다는 데서 착안한 아이템이다.

해당 스마트폰 플랫폼은 종활과 관련한 16가지 유형의 정보를 기록할 수 있고, 각 항목별로 특정 가족구성원을 지정해 원하는 타이밍에 전달할 수 있다. 16가지 유형의 정보로 대표적인 것은 가족 메시지·예금·유가증권·보험·부동산·차입금·병원·개호·장례식· 반려동물 등에 대한 정보며 이를 가족에게 전달하는 타이밍을 즉시 전달, 치매 진단 시 전달이나 사후 전달 등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자녀나 손자녀들이 고령층의 혈압이나 걸음 수 등 건강관리·식단 기록· 치매예방 게임 등의 앱 이용 내열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 3대에 걸친 브랜드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MUFG는 마케팅 차원에서 서비스 범위를 자사 계좌를 보유하지 않은 고령층에게까지 확대했다.

고령층이 해당 플랫폼을 이용하는 동안 자사 직원과 상속 관련 전화상담, 웹 유언장 작성서비스 등 연계 서비스를 제공하며 전문성을 부각시켰다. 이는 자연스레 유언신탁 가입을 유도할 수 있었다.

엔딩노트 작성이나 웹 유언장 작성서비스 등이 인지도는 높을 수 있으나 모두 법적효력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자사 상품을 강력하게 홍보하는 효과를 낳았다.

무엇보다도 신탁은행 입장에서 이 같은 유언신탁을 늘려가는 과정이 후손 세대(상속인)와 비즈니스 기회를 확장하는 절차로 기능했다는 점이 탁월하다. 비슷한 사례로 치매신탁 상품 역시 같은 결의 서비스와 마케팅 전략을 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 2022년 상속·증여재산 규모가 188조 4000억원으로, 2017년에 비해 2.08배나 증가한 바 있다. 또한 유언대용 신탁 규모 역시 전 업권 기준 2022년 2조원에서 2023년엔 5대 은행만 봐도 3조원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MUFG를 벤치마킹해 고령층과 후손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디지털 편의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브랜드 친밀감과 신뢰감을 제고하는 전략은 매우 주효하다. 아직 국내 금융회사는 이러한 디지털 서비스는 출시 전이다. 유사 서비스를 개발한 IT기업이나 상조회사 등과의 제휴도 고려해 볼만 하다.

무엇보다도 신탁의 수익자인 미래세대가 서비스 만족도를 느낀다면 상속이나 증여받는 재산을 해당 금융기관에 유지하고 축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MZ세대 미래 고객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마케팅 효과조차 검증되지 않은 아이돌 모델을 기용하는 데 큰 비용을 쓰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이다.

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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