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유엔군./사진=연합뉴스

[한국스포츠경제 김현준] 딘 애치슨 전 미국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12일 미국 전국기자클럽(NPC)에서 발표한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한반도의 역사를 바꾼 중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으로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애치슨 라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해당 방위선에 한국과 대만이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애치슨 라인은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6.25 전쟁의 주원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미국의 방위선에 한반도가 빠져있는 사실을 확인한 김일성이 이후 소련의 스탈린을 찾아가 설득해 남침을 주도했다는 이야기다. 미군이 없는 한국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중국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누르고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 상태였다. 중국 본토가 공산화됐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미국에 있어서 중국은 관심 밖이었다. ‘자유주의의 선봉장’에게는 오직 소련만이 아시아와 태평양의 자유주의를 위협할 주 적이었다. 그리고 애치슨이 속한 트루먼 정부는 중국이 대만을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여도 이를 용인할 입장이었다. 이는 중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이들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트루먼 정부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 미국 정부의 의도와 달리 중국의 마오쩌둥은 1950년 2월 14일 소련의 스탈린과 중·소 우호동맹과 상호 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이였지만, 당시 ‘사회주의’라는 결속된 사상으로 중국의 개혁과 개발에 도움을 제공할 국가는 소련밖에 없었다.

한편, ‘애치슨 선언’을 접한 김일성은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는 ‘남침’을 실행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모스크바로 직접 찾아가 스탈린에게 파병 승인을 요청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소련의 지원도 필요했지만,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해선 ‘사회주의의 중심국’ 소련의 동의라는 명분도 있어야 했다.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 대결이 예상되기에 처음에는 남침을 반대했으나 '미국이 참전할 경우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군대를 한반도에 보낸다'는 확답을 받아오면 전쟁을 용인하겠다는 조건부 승인을 해주었다.

이에 김일성은 즉시 마오쩌둥을 찾아갔다. 마오쩌둥 역시 처음에는 주저했다. 그러나 결국 한반도는 애치슨 라인에 해당하지 않으니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며, 현재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열악한 수준이기 때문에 속전속결이 가능하다는 김일성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 일련의 과정은 미국의 예측을 이상으로 중국과 소련, 그리고 북한 간의 복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있었기에 가능했다.

스탈린의 승인, 그리고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에게 주저함은 없었다. 그는 68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소련이 지원한 T34 장갑차를 필두로 남한을 침공했다. 또한, 중국역시 6.25전쟁 당시 미국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남측의 승기가 확실한 상황에서 북한을 돕기 위해 1951년 1월 30만에 달하는 중공군을 투입시켰다. 중공군의 개입은 한국전쟁을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바꾼 것은 물론, 전쟁이 3년 이상 승자 없이 지속되게 만들었다. 결국 ‘애치슨 라인’은 의도치 않게 6.25전쟁의 계기는 물론, 전쟁의 장기화에 일정 부분 원인 제공을 한 정책이 되었다.

김현준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