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게 드리운 포연으로 전장은 어지럽다. 아직 정리가 덜 끝난 전장은 승리의 찬가와 패배의 애가가 뒤섞여 불협화음을 이룬다. 
코로나19가 레퀴엠을 변주하는 가운데 치러진 총선은 15일간 나라 전체를 막장 정치드라마의 무아지경으로 이끌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후보들의 외마디 비명에 우리의 이성은 마비됐고 후보와 혼연일체가 된 우리는 승패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어디에 걸었건 잔치는 끝났고 ‘여권 압승, 야권 몰락’이라는 결과의 짜릿함은 하루해를 넘기지 못했다. 

총선 압승으로 향후 정국주도권과 결정권을 손을 쥔 여당의 중추는 당연 ‘586세대’다. 그래서인지 선거 구도를 짤 무렵 도출됐던 ‘586 퇴진론’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증발했다.
‘586’은 본디 ‘386(30대 연령,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생)’이라는 이름으로 김대중정부 시절 본격 등장했으니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선거 시점으로 자연연령이 50대 중후반, 일부는 60대에 들어섰다.
이들 ‘386’ 대부분은 노무현 대통령시절 화려하게 개화했다. 
2004년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탄핵시도가 무산되고 역풍 가운데 치러진 제17대 총선에서 탄생한 187명 초선 국회의원 가운데 정치신인이었던 30~40대 ‘386’들이 대거 금배지를 달았다. 
일명 ‘탄돌이’로 불린 이들의 등장은 정치권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이들은 강력한 정치개혁세력을 자임했다. 면바지를 입고 등원하거나 소형승용차를 이용하고 가부장적 정치문화를 거부하는 모습은 참신했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 바뀌며 정치지형 변화에 따른 부침은 있었으나 이들은 오늘날 ‘586’이 돼서까지 대한민국 정치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문재인 정부 3년간 청와대와 정부, 국회 등 곳곳에 포진해 대한민국을 경영해왔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로 민주정의 극약인 독재 출현을 극도로 혐오했다. 
알려진 대로 그는 매년 독재의 위험이 인물을 도자기 조각에 이름을 적어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로 아테네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하지만 그가 인류 역사에 기리남긴 유산은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평의회 제도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주주의 근간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아테네의 특성을 살려 10개 부족으로 나누고 500명으로 구성되는 평의회를 조직해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했다. 평의회를 구성하는 500명은 지역별로 뽑혔고 물론 모든 시민이 참정권을 가졌다.
우리 정치권에서 ‘586’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통일과 남북교류가 금기이던 시절, 기꺼이 몸을 던져 역사발전에 기여했고 독재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가부장적 정치문화에 찌든 정치권의 소금이었고,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에게 빛으로 다가갔다. 
‘586’은 훈장이었고 고난을 이긴 상징이었으며 대한민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꾼 개혁의 주체를 의미했다.
알려지기로 아테네 민주정을 열었던 클레이스테네스도 도편추방됐다. 자신이 열렬히 신봉했던 신념은 자신이 만든 민주절차와 자기희생을 통해 살아남았다.

‘586’이 이제 개혁주체에서 개혁대상으로 변질됐다고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586’이 이미 기득권층으로 박제됐다고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586’이 열었던 시대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블록체인, AI(인공지능), loT(사물인터넷) 등 4차산업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는데 이를 이해하기도 바쁜 ‘586’이 주도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이후 패러다임 자체가 다른 세계를 열어가기는 역부족이다.
이제 모두를 위해 자기희생의 퇴장을 준비해야 할 때다. 4년은 길다.

장강의 도도함은 앞물이 뒷물에 양보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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