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의 볼턴 회고록 수정요구 서류/ 연합뉴스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미국 백악관이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과 관련, 한반도 관련 내용을 포함해 400곳 이상의 수정과 삭제를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볼턴은 재임 기간 겪은 각종 외교·안보 현안에 관한 일을 책으로 썼고, 백악관은 국가기밀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기각된 상황이다. 법원은 볼턴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그가 기밀을 공개함으로써 국가안보를 위험에 처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백악관은 소송 과정에서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서 볼턴의 책 내용 중 415곳 정도에서 수정 또는 삭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책 전체는 570쪽이다.

특히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 사안을 다룬 두 개의 장에서만 110군데가 넘는 수정, 삭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볼턴의 책에는 남북, 한미, 북미 정상간 논의내용과 고위급 인사들의 대화가 담겨 있는데, 진위를 떠나 이를 책에 담는 것 자체가 외교적 신뢰를 저버린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당장 볼턴의 카운터파트인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정부 간 상호 신뢰에 기초해 협의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외교의 기본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백악관도 한미 균열과 북미관계 악화를 우려한 듯 아예 문장 자체의 삭제를 요구하는가 하면, 단정적인 문장에는 '내 의견으로는', '알게 됐다'라는 식의 표현을 추가하라고 주문했다. 마치 볼턴의 주장이 미국의 입장인 양 비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북한 비핵화라는 용어에 대한 한국의 이해는 미국의 근본적 국가이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적은 부분에는 '내 추측에는'이라는 말을 추가하라고 요구했고, 책에는 '내 관점에서는'이라는 표현이 더해졌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와 다른 어젠다를 갖고 있다”는 문장 뒤에는 “어느 정부도 자기 국익을 우선시하는 것처럼”이라는 문구를 추가하도록 했다. 북한을 의식한 듯한 주문도 있다. 볼턴이 애초 “북한이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표현한 부분은 백악관 요구를 받아들여 “북한이 핵심 정보를 숨기고 있다”로 바뀌었다.

또 볼턴이 포렌식을 통해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규모와 범위에 관한 중요한 결과를 추론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 백악관은 이런 일이 북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표현을 넣으라고 주문했다.

일부 문장에서는 '~할 것'(would)이라는 단어를 '~할 수 있을 것'(could)으로 바꾸라고 하는 등 미묘한 뉘앙스까지 신경 쓴 흔적도 보였다.

하지만 백악관 요구가 전부 다 반영된 건 아니다. 책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도 국내 사정이 어려워지면 일본을 이슈화한다고 적었는데, 백악관은 문 대통령을 한국인으로 바꾸라고 주문했지만 볼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미 법무부는 볼턴이 기밀누설 금지 관련 고용 계약을 위반했고 기밀정보 삭제 등의 절차를 마치지 못했다며 회고록 출판 금지 명령을 신청했지만 지난 20일 법원은 출간을 막기엔 너무 늦었다며 이를 기각했다.

고예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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