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 무질서와 혼돈, 공포의 그림자가 짙다. 수도 카불이 함락된 15일 공항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죽음 앞에 직면한 시민들은 개미떼처럼 공항으로 쏟아졌다. 일부는 항공기 동체와 바퀴에 매달렸다가 추락해 죽음을 맞았다. 또 철조망 밖 군인에게 아이를 넘기는 안타까운 광경도 포착됐다. 미군에 협조한 사람을 색출, 처형하는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공포는 걷잡을 수 없다. 아프간 사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첫째, 생존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다. 미국이 아프간에 발을 들여 놓은 건 2001년 10월. 오사마 빈 라덴을 색출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시작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20년 동안 100조 가까운 예산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더 이상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자 단호하게 손절했다. 철군에 따른 혼란은 충분히 예상됐지만 국익이 우선이었다. 결국 타인에게 의존하는 생존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1975년 4월 29일 베트남 패망 때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무능은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수도 카불이 함락되기까지는 파죽지세였다. 미국은 최소 1년에서 1년6개월은 버틸 것으로 예상했다. 아프간 정부군은 30만 명인데 비해 탈레반군은 7만5000명으로 크게 차이가 있고, 미국이 지원한 무기와 군수품도 풍부하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또 탈레반과 달리 아프간 정부군은 공군을 보유하고 있어 공습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아프간 정권은 의지가 없었다. 탈레반이 일주일 만에 카불에 진입하자, 내무장관은 평화로운 정권이양을 약속하며 곧바로 항복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미군이 남기고 간 군사 자산은 탈레반에게 몽땅 넘어갔다. SNS에는 탈레반 반군이 미군 군복을 입고, 미제 M16소총과 차량을 자랑하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넘쳐난다. 또 탈레반이 미군 험비를 타고 순찰하는 영상도 있다. 험비는 해외 주둔 미군의 상징으로, 미국인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다. 또 UH-60 블랙호크 공격헬기 수 십대도 넘어갔다.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는 무능한 정권에게 외부 지원은 '빈 독에 물 붓기'였다.

 

셋째, 위기 시에 나타나는 최고 지도자 역량이다. 가니 대통령의 마지막 처신은 촌부만도 못했다. 그는 “군이 주민 안전을 책임지도록 지시했다”고 발표한 뒤, 자신은 다른 나라로 도피했다. 더구나 현금을 갖고 도주해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UAE에 머물고 있는 가니는 페이스북을 통해 “탈레반은 나를 타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학살을 막기 위해 떠났다”고 변명했다. 위신도 품격도 잃은 졸렬한 처신으로, 아프간 국민에게는 불행이다.

 

카불 점령 이후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 주요 인사들과 미군에 협력한 인물에 대한 체포 및 언론인 살해에 나섰다. 군, 경찰, 정보기관에서 일하던 인물들이 대상이다. 탈레반은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가족을 대신 체포할 것”이라며 자수를 종용하고 있다. 이미 카불 인근 지역 경찰청장은 체포돼 총살됐다. 앞서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 등 기존 적대 세력에 대한 보복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여성·어린이에 대한 공포정치가 우려된다. 지난 20년간 아프간 여성·어린이 인권은 크게 개선됐다. BBC방송에 따르면 2017년 아프간 여자 중학생은 350만 명에 달했다. 텔레반 치하 1999년에는 한 명도 없었다. 고등 교육을 받는 여성도 크게 늘어 아프간 대학생의 약 3분의 1이 여성이다. 사회 진출도 활발해졌다. 아프간 여성의 5분의 1이 직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탈레반이 재집권하면 20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성은 교육과 사회생활이 금지되며 남성 보호자 없이는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땐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는 ‘부르카’를 착용해야 한다. 

 

유엔난민기구를 비롯한 18개 국제단체는 공동성명을 내고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인을 저버릴 때가 아니다”면서 국제사회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우리 국회도 국제사회와 공조하고 아프간 사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한국전쟁 잿더미에서 교역규모 10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것도 국제사회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해 한용운이 1936년 조선일보에 쓴 '반성'이란 글은 혼돈에 처한 아프간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만해는 “만고를 돌아 보건데, 어느 국가가 자멸하지 아니하고 타국의 침략을 받았는가. 어떤 나라든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망하게 할 수 없다. 수백 년 부패한 정치와 현대 문명에 뒤떨어져 망한 것이다”고 했다. 어느 나라든 몰락은 무능한 정권, 부패한 지도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문제점을 내게서 찾아야 다시 당하지 않는다'는 경고로 읽힌다.

 

물론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을 아프간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만큼 우리 의식수준은 선진화됐다. 하지만 진리는 동서고금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곱씹어볼만 하다.

김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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