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최초 여성 총리, 변방 동독 출신, 물리학자, 포용의 리더십, 그리고 최장수 총리다. 메르켈은 헬무트 콜과 함께 16년 재임이라는 최장수 총리로 기록된다.

 

2005918일 독일 총선은 메르켈이 정치 전면에 나선 출발점이다. 당시 메르켈을 총리 후보로 내세운 중도 우파 기민기사당 연합 득표율은 35.2%이었다. 34.2%를 얻은 중도 좌파 사민당을 간발로 따돌린 불안한 출발이다.

 

독일 정치인과 국민들 누구도 16년 집권을 예상치 못했다. 메르켈은 2005, 2009, 2013, 20174차례 총선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메르켈은 독일과 위기에 처한 EU를 안정적으로 이끌며 존경받는 리더십을 구축했다. 재임기간 중 그리스 경제 위기와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난민 문제를 해결했다.

 

포브스는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2010년 제외)에 선정했다. 또 타임은 2015년 올해의 인물로 뽑았다. 정작 독일 국민은 메르켈을 무티(Mutti엄마)’라고 부른다. 연방정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일과 후에는 동네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장을 보거나, 소박한 의상을 고집하는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경한다.

 

메르켈 리더십은 부정부패와 마초 중심 국제 정치무대에 신선한 자극이다. 메르켈은 모든 길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독일 역사상 자발적으로 퇴장하는 첫 총리이기도 하다. 사임은 선거 패배나 개인적 문제가 아닌 스스로 의지다. 16년 동안 재임한 헬무트 콜은 선거에서 패해 물러났다.

 

지금 한국 정치판은 대장동 개발 의혹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아수라장으로 전락한 대선 정국에서 메르켈 리더십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메르켈은 26(현지 시간) 총선을 끝으로 물러난다.

 

결단과 추진력을 바탕에 둔 리더십

메르켈은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첫 위기는 2008년 국제 금융위기였다. 메르켈은 뱅크런(은행 지급불능 사태)’을 막기 위해 야당을 설득해 4800억 유로라는 대규모 구제 금융을 편성했다.

 

2009년 그리스 재정 위기 때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메르켈은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EU국가들에게 구조개혁과 긴축정책을 압박했다. 그리스 정부는 메르켈을 비판했지만 덕분에 유로존은 위기를 넘겼다.

 

유로화에 대한 신뢰를 구축한 건 큰 업적이다. 하르트무트 코쉬크 전 재무부 차관은 당시 많은 독일 국민들은 유로화 실패를 예상했다. 독일 국민에게 EU와 유로화에 대한 동의를 얻고 국제사회 신뢰를 확보한 건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초기 대응도 과감했다. 그는 지난해 3“2차 세계대전 이후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라며 공공시설과 상점을 셧다운했다. 또 대규모 예산 편성에 반대하는 EU국가를 설득해 7500억 유로에 달하는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합의를 이끌어냈다.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을 놓고 소모적 논쟁을 반복하고,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손실보상에 미온적인 우리와 비교하면 과감하고 빨랐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편적 인류애와 겸손한 리더십

메르켈은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당시, 대규모 난민이 유럽으로 넘어올때 대부분의 국가는 난민 수용에 소극적이었다. 난민 유입은 유럽 정치지형을 극우정치로 바꿀 정도였다. 프랑스는 3만여 명을 수용했지만, 마리르펜이라는 극우정당 후보가 대선 결선에 진출할 만큼 극우화됐다. 메르켈은 지지율 악화를 예상하면서도 100만명을 결정했고 최종 117만 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거부한다면 독일은 더 이상 나의 조국이 아니다며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비록 지지율은 떨어졌지만 국제사회에서 도덕적 권위는 올라갔다.

 

2013820일에는 역대 총리 가운데 처음으로 뮌헨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방문,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무엇보다 연방 정부로부터 모든 행정재정적 지원을 마다하고, 스스로 가사를 돌보는 소탈함과 겸손함은 좋은 본보기다. 권위주의로 무장하고 과잉 의전에 무감각한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실용주의와 포용의 리더십

야당을 포용하는 협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미국과 우호적이되 중국, 러시아와도 실용적 외교를 펼쳤다. 반대 야당을 설득하고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면 야당 정책도 기꺼이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정책 토론을 활성화했다. 탈원전 추진, 모병제 전환, 연금수령 연령 하향, 최저임금 법제화는 야당 정책을 받아들인 대표적 사례다.

 

또 계파정치와 온정주의를 경계했다. 비록 같은 진영일지라도 국민의 눈높이에 못 미친다고 판단되면 단호했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도운 콜 총리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사임을 이끌어냈다. 또 정책실패 책임을 물어 교통부 장관을 비롯 여당 소속 장관을 해임했다. 측근 발탁과 코드 인사, 그리고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흠결이 드러나도 내편이라며 감싸는 한국 집권여당과 차별화되는 행보다.

 

떠날 때를 아는 리더십

메르켈은 2017년 마지막 총선에서 더 이상 입후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총리직도 마지막 임기라고 명확히했다. 또 EU와 국제사회에서 어떤 직책도 맡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높은 지지율은 여전하다. 독일 공영방송 ARD 여론조사 결과 메르켈 시대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75%에 달했다. 퓨리서치센터가 최근 공개한 여론조사에서도 메르켈은 16개 지도자 가운데 최고 지지율(77%)을 얻었다. 메르켈은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직을 사임한다. 권력욕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나 아니면 안 된다며 추한 행보를 보이는 한국 정치인에게는 좋은 반면교사다.

 

20131월 중국 쓰촨성 광위엔(廣元) 방문길에 여성 정치인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광위엔은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태어난 곳이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 직후였다. 만나는 중국인마다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측천무후는 기득권층과는 불편했지만 무주의치라는 칭송을 얻을 만큼, 일반 국민에게 좋은 정치를 펼쳤다. 비록 박근혜가 극우보수 정치인일지라도 진영을 넘어선 정치인이길 기대했다. 하지만 국정농단이라는 후유증을 남긴 채 자멸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5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아수라장이 된 대선 정국에서 어떤 지도자를 선택해야할지 메르켈 리더십을 돌아본다.

김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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