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사람은 집단으로 모이면 극단으로 나아간다. 집단에 소속되면 혼자 있을 때는 절대하지 않을 일을 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캐스R. 선스타인 하버드대학 교수가 쓴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한국 정치에 만연된 정치 팬덤과 연결 지어 생각할 대목이 많다. 선스타인 교수가 제시한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 개념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게 보이는 정치 팬덤을 이해하는 열쇠다. 양당은 합리와 상식이 실종된 채 정치 팬덤에 휘둘리며 휘청대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집단 극단화는 한층 기승을 부리는 모양새다.

정치권에 만연된 정치적 극단주의는 집단 극단화 산물인 경우가 많다. 집단 극단화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모여 이야기하다보면 극단이 더 심화되는 경우다. 선스타인 교수는 진보적인 볼더 주민과 보수적인 콜로라도 주민을 대상으로 실험해 입증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소수자 우대정책)과 동성 결혼, 기후변화를 주제로 토론에 부쳤다. 결과는 토론 후에 더 신념이 강화됐다. 진보 볼더 주민들 사이에 소수자 우대정책과 동성 결혼, 기후변화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더 늘었다. 반면 보수 콜로라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반대하는 입장이 더 심화됐다.

내년 총선 공천을 둘러싸고 더불어민주당 공천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비명계 원외 인사들이 잇따라 ‘부적격’ 판단을 받은데 이어 친명계 호남지역 출마 예정자들 사진과 이름을 담은 ‘호남 친명 출마자 추천 명단’이 나돌면서다. 앞서 지라시 행태로 나돈 ‘수박 의원 명단’과 궤를 같이 한다. 낯 뜨거운 ‘친명 팔이’ 명단은 민주당 강성 지지층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수박 의원’은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과정에서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추정되는 의원들을 겨냥한 것이다. 확인 되지도 않은, 확인할 수도 없는 비공개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작성한 의도는 명백하다. 편을 갈라 자신들과 결이 다른 의원들은 솎아내겠다는 것이다.

생각이 같은 이들로만 당을 만들겠다는 집단 극단화는 위험하다. 선스타인 교수는 집단 극단화의 가장 큰 폐해로 내부 다양성 억제와 동질성 강화를 꼽았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 목소리만 높아지면 다양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조직이라면 다양한 논의는 상식이다. 또 비판적 의견에 귀 기울이고 수렴할 때 국민들로부터 지지받는다. ‘친명 출마자 추천 명단’은 순혈주의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끼리 동질성이 강화되면 견제 장치는 망가진다. 견제 없는 조직은 괴사하기 마련이다. 생각이 같은 이들끼리 모이면 의사결정은 빠르겠지만 필터링 없는 잘못된 판단은 조직을 망친다.

박근혜 정부에서 치러진 20대 총선 결과는 좋은 사례다. 집권여당 새누리당은 압승을 자신했다. 허나 결과는 더불어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으로 새누리당은 원내 제1당 지위를 내주고 말았다. 조짐은 충분했지만 무시됐다. 공천을 둘러싸고 친박 비박으로 나뉘어 파벌 논쟁은 격화됐다. 급기야 친박 안에조차 ‘진박’을 찾겠다며 ‘진박 감별사’까지 등장했다. 김무성 당대표가 직인을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공천 갈등은 폭발했다. 내편만 고집하는 집단 극단화를 국민들이 용납할리 없었다. 싸늘한 민심은 새누리당에 등 돌렸고 결과는 원내 제2당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원내 1당 지위를 내준 결과 대통령 탄핵,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친명계 비례대표 의원과 원외 인사들의 비명계 지역구 사냥은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생각 있는 지도부라면 강성 지지층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친명 팔이’ 명단에 좌우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명단이 나돈다는 자체로 민주당은 병들었다. 공천 기준은 이재명 대표와 가깝냐 아니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성과 역량, 의정활동이 잣대다. 당대표 로열티를 따져하는 공천은 사천이다. 공당 후보를 결정하는 기준이 당대표와 친소관계나 충성심에 있다면 더 이상 민주당이 아니다. 호남 유권자들 또한 바보가 아니다. 민주당 깃발만 들었다고 무조건 선택하던 호시절은 지난지 오래다. 그래서 민주당 뿌리인 호남에서 친명 논란은 부끄럽다.

이낙연 전 총리가 신당 창당을 시사한 것 또한 집단 극단화 때문이라는 걸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내부 다양성을 가로막는 당 운영에 한계를 느낀 선택이다. 공정한 공천을 통해 더 이상 극단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세균, 김부겸 전 총리 또한 당 분열을 막기 위한 공정한 공천 필요성에 의견을 모았다. 공정한 공천은 공당이라면 당연하다. 당연한 것조차 힘겹게 말해야 하는 민주당에 필요한 게 있다면 ‘집단 극단화’가 아닌 ‘집단지성’이다.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범한 어리석음을 되풀이 한다면 민주당은 진짜 바보다.

임병식 정치전문 논설위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