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훈 ESG경제부 부장.
                                양세훈 ESG경제부 부장.

 

새해 결심

“러닝머신이라도 사주면서 말하든가.” 
아내와 나에게 러닝머신을 선물했다. “살 좀 빼”라는 압박에 투덜거리는 아내의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기 때문이다. 결혼 전 호리호리하던 아내가 어느새 중년의 후덕한 아줌마가 돼 있는 모습은 죄책감마저 들게 했다. 선물은 퇴근 후 걷기 운동이라도 하라는 배려(?)이자 새해 다이어트 결심에 대한 동기부여이기도 하다. 내심 기대가 컸다.

아내는 딸과 함께 올여름 워터파크에 가기 위해서라도 살을 빼겠노라 선언했다. 퇴근 후 최소 30분은 꼭 달리겠다고 다짐하며 최신 러닝머신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에어 기능이 있는 하얀색 러닝화도 주문했다. 진심이었다. 

다짐은 한 달을 못 갔다. 맞벌이에 퇴근 후 육아와 살림까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육신으로는 뛸 엄두가 안 난다는 이유에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럴듯한 핑계다. 러닝머신은 외투를 걸쳐놓는 옷걸이로 용도 변경됐고, 이불 빨래를 널 때 그 쓰임새가 완벽했다. 

남편은 최근 아내에게 유예기간을 통보했다. 한 달 내에 사용을 안 하면 부모님 집으로 옮겨놓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아내는 언젠가는 달리겠노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보고만 있어도 살이 빠질 수 있다며 ‘플라시보(placebo)’ 효과까지 들먹였다. 결국 미안했던지 새해 다짐은 ‘작심삼일’이 인간적이라며 능청이다. 큰돈(?)을 러닝머신에 투자한 남편도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이렇게 거실 명당을 꿰찬 러닝머신은 집안의 애물단지가 됐다. 언젠간 다시 달릴 날이 오겠지. 덩그러니 놓인 러닝화가 유독 하얗다. 

기업과 러닝머신

기업들도 러닝머신 위를 달린다. 경영 위기에 처한 기업들은 구조조정과 부채를 줄이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한순간 타이밍을 놓치기라도 하면 위기는 스멀스멀 덮쳐온다.

과거 LG경영연구원에서 발표한 ‘지속 성장 기업의 조건’이라는 보고서는 기업이 쉼 없이 뛰어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는 글로벌 경영 환경 속에서 기업이 생존하는 기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1995년 Fortune America 500 기업 중 10년 후인 2005년까지 그 지위를 유지한 기업이 292개사로 58.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약 41%의 기업들이 그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리스트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292개 기업 중 다시 80개가 넘는 기업이 10년 동안 순위에서 사라졌고, 그 결과 1995년에서 2015년까지 순위 내에 살아남은 기업은 42%에 불과했다. 절반이 넘는 기업이 도태됐다. 

다시 뛸 준비

바야흐로 ESG 시대다. ESG로 경영하고 ESG로 평가받는다. ESG를 안 하면 뒤처진다. 때문에 ESG 공시 의무화 논의가 전 세계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도 2026년부터 기업들은 ESG 공시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정부도 이 흐름에 발맞춰 국내 ESG 공시 기준 초안을 3~4월 중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업들이 잘 달릴 수 있도록 러닝머신을 마련하겠다는 의미다. 그래서 기업들도 달릴 준비에 분주하다. 많은 기업이 RE100 가입을 선언하고 ESG 추진전략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다. 

반대로 너무 여유로운 기업도 있다. 발등의 불은 딴 세상 이야기이고 ESG는 돈 있는 기업에서나 홍보용으로 하는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기도 한다. 이를 방증하듯 ESG행복경제연구소에서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시총 200대 기업 가운데 ESG보고서(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지 않은 곳이 무려 34개사에 이른다. 아무리 현재 의무공시가 아니라고 해도 이들 기업은 뛸 준비가 덜 된 것이다. 더구나 공시 기업 166개사도 환경정보 공개에 미온적이고 탄소중립과 에너지 절감, 자원의 재사용과 재활용 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과 자가진단 등의 실제적인 노력이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ESG 경영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다이어트도 그렇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다짐이 없다면 실패는 항상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물론 기업마다, 개인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고, 그럴듯한 핑계는 수만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 핑계로 성공한 사람은 김건모뿐이라고. 다시 달려야 한다. 

양세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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