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한스경제=김호연 기자] 이건희 회장의 별세와 함께 그의 78년 발자취에도 국내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25일 향년 78세로 별세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호암(湖巖) 이병철 전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5살까지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1947년 상경해 학교를 다녔고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유학을 시작했다.

일본 유학생활을 마친 뒤엔 서울 사대부고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 MBA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어린 시절 영화 감상과 애완견 기르기에 관심이 많았고, 서울사대부고 시절엔 레슬링부에서 활동할 만큼 예체능에도 소질이 있었다.

이 회장이 본격적인 경영 일선에 뛰어든 건 1970년대다. 그는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해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하이테크 산업 진출을 모색했고,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후계자로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삼성의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맡아 유공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나 쓰라린 실패를 맛본 이 회장은 삼성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 20여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호암의 눈밖에 나면서 이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됐다.

1982년에는 양재대로에서 덤프트럭과 교통사고가 나 아찔한 순간을 넘기기도 했다.

아버지 일군 텃밭에 꽃피운 반도체 신화…모범적 2세 경영

(왼쪽 세번째부터) 故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아버지 이병철 창업주. /연합뉴스

이 회장은 1987년 이병철 창업주 별세 이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고인이 생전 가장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고 있는 부문이 바로 반도체라고 말할 정도로 반도체 사업에 애착을 드러냈다. ‘주식회사’와 ‘원자력’, ‘반도체’를 인류의 3대 발명품으로 꼽으며 반도체가 미래 산업 사회 생활 전 분야에 걸쳐 필수요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회장 취임 이전부터 경영진의 반대를 뚫고 부도난 한국반도체를 인수했고, 1983년부터 2~3년간 반도체 1, 2라인에 그룹 역량을 쏟아 부었다. 1987년에는 3라인 건설 착수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무너진다는 혹평까지 나돌았지만 1988년 반도체 시장이 대호황을 맞으며 삼성의 반도체 신화가 시작됐다.

이후 삼성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했으며, 꾸준히 굵직한 핵심 기술을 세계 최초로 내놓으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고인은 무역 중심이던 회사의 방향성을 전자산업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삼성그룹을 글로벌 유수의 기업으로 변모시킨 경영인으로 평가 받는다.

고인이 회장으로 취임하던 1987년 삼성그룹의 시가총액은 1조원, 임직원 10만명, 수출은 63억달러였다. 매출은 9조9000억원으로 10조에 미치지 못했다.

그 자체로도 부족할 것 없는 국내 일류 기업의 위상을 차지했겠지만 고인은 남다른 집념으로 삼성그룹을 키웠다. 1987년 1조원이던 삼성그룹의 시가총액은 2012년 390조원대로 40배나 성장했고 총자산 500조원의 외형을 만들었다. 시가총액은 거래소 상장기업 전체의 26% 이상을 차지하고, 과거에 비해 300배 이상 성장했다. 그룹 총매출은 40배 늘어나 정부 총수입과 대등한 수준이다.

인터브랜드가 추산한 올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623억달러(한화 약 70조3055억원)로, 처음으로 ‘글로벌 톱5’에 이름을 올렸다. 고인의 공언대로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명실상부한 글로벌 초일류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반도체·스마트폰 선진국 이끈 ‘신경영선언’

삼성전자 사옥. /연합뉴스

거침없는 반도체 신화에도 부침은 있었다.

이 회장은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내 전자제품 매장에서 삼성전자 제품이 매장 구석에 먼지 쌓인 채 놓여있던 것을 두 눈으로 발견했다.

다음해 사내방송 SBC의 품질고발 방송프로그램을 보고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세탁기 조립라인에서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이 닫히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내고 조립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고인은 ‘신경영선언’을 발표하며 질적 성장의 신호탄을 날렸다.

신경영선언은 반도체·스마트폰 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한 삼성을 만들었다. 당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은 지금의 거대 삼성을 있게 한 유명한 일화로 손꼽힌다.

삼성전자의 초라한 국제적 위상을 확인한 이 회장은 삼성전자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대대적인 변혁을 주문했다.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명과 함께 350시간의 토의를 갖는 이른바 ‘신경영 대장정’에 나섰다.

이후 삼성전자는 품질경영, 질경영, 디자인경영 등으로 대도약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경영선언 후 탄생한 ‘라인스톱제’는 제품별 불량률을 30%에서 많게는 50%까지 줄였다.

이러한 고인의 질적 성장에 대한 위기의식이 신경영선언으로 이어졌고, 삼성그룹이 글로벌 시장의 무명 기업에서 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2006년 글로벌 TV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시장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개 품목의 글로벌 1위를 일궈냈다. 삼성전자가 카피캣의 오명을 씌운 애플을 추월하는 데도 고인의 집념이 큰 역할을 했다.

찬란한 ‘삼성신화’로 스포츠라이트…다양한 비리 의혹에 홍역

연합뉴스

이 회장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국내외 재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다양한 비리와 연루됐다는 의혹에 휩싸이면서 각종 수사로 홍역을 치렀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특검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특검팀에 의해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되자 2008년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발표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단독사면된 이 회장은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했고, 조직 재정비와 삼성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헌신했다.

2014년 5월 10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켜 병원에서 심폐소생술(CPR)까지 받고 소생해 치료를 이어왔다.

이후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져 막힌 심혈관을 넓혀주는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고 심폐기능이 정상을 되찾자, 입원 9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병원 20층에 있는 VIP 병실로 옮겨져 재활치료를 이어왔다. 하지만 장기 입원 치료에도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

현재 삼성그룹이 전자 계열사를 통해 안정적 수익을 내며 승승장구할 수 있는 기틀은 이 회장 시기에 구축된 것이다. 고인은 경영 일선에서 활약하는 내내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0년 3월 24일 1년 11개월여의 공백 끝에 경영에 복귀한 고 이건희 회장의 복귀 일성은 “지금이 위기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였다.

한편 고인의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으로 간소하게 치러진다. 조화와 조문도 정중히 사양한다는 계획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등이 있다.

김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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